임영대군 이구(臨瀛大君 李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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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8년(태종 18)~1469년(예종 1) = 52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적출 8남 2녀 중에서 제 4왕자. 봉작(封爵)은 임영대군(臨瀛大君)이다. 자는 헌지(獻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영의정청송 심씨(靑松沈氏)심온(沈溫)의 딸이다. 친형은 문종(文宗)이향(李珦), 세조(世祖)이유(李瑈),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이고, 친동생은 광평대군(廣平大君)이여(李璵),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 평원대군(平原大君)이림(李琳),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이다. 친누이는 정소공주(貞昭公主)정의공주(貞懿公主)다.

세종 시대 활동

1428년(세종 10) 대광보국(大匡輔國) 임영대군이 되었고, 1430년(세종 12) 12월 8세 때 임영대군에 봉해졌다. 1430년(세종 12) 5월 나이 13세 때 여러 대군과 함께 종학(宗學)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전후하여 대언(代言)남지(南智)의 딸과 혼인한 것 같은데, 부인 남씨는 원래 ‘뇌전증[顚狂之疾]’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 남지가 이것을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혼인을 시켰다. 1443년(세종 15) 6월 나이 16세 때 첫째 부인인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이혼하고, 둘째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와 재혼하였다. 마침 맏형 세자 이향(李珦)이 세자빈 김씨(金氏)와 세자빈 봉씨(奉氏)를 연달아 출궁시켰기 때문에 소헌왕후가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고심 끝에 아들의 행복을 위하여 부인 남씨와 이혼하도록 하였다. 그해 윤8월 세종은 고(故) 봉례(奉禮)최승녕(崔承寧)의 딸을 간택하여, 12월 임영대군이 둘째부인 전주 최씨를 친영(親迎)하였다.

1438년(세종 20) 3월 김종서(金宗瑞)가 함경도의 6진(鎭)을 개척할 때, 도성에 각 진(鎭)의 경재소(京在所)를 설치하였는데, 진양대군(晉陽大君: 세조)은 경원(慶源)을, 안평대군은 회령(會寧)을, 임영대군은 경흥(慶興)을, 광평대군은 종성(鍾城)을 맡겨, 국토 개척의 어려운 사업을 서울에서 체험하게 하였다. 1439년(세종 21) 22세의 임영대군이 창기(娼妓) 금강매(錦江梅)를 좋아하여 첩으로 삼았는데, 세종이 이를 허락하자, 좌부승지허후(許詡)가 경연에서 세종에게 임영대군에게 기첩(妓妾)을 삼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간청하였다. 또 내자시(內資寺)의 여종 막비(莫非)를 간통하였고, 또 궁중 시녀 인수부(仁壽府)의 여종 금질지(金叱知)를 좋아하여 간통하자, 세종이 이를 걱정하여 영의정황희(黃喜)와 우의정허조(許稠)를 불러서 비밀리 의논하고 임영대군의 직첩(職牒)을 빼앗았다. 1440년(세종 22) 다시 임영대군에게 직첩을 되돌려주었다.

1441년(세종 23) 3월 세종과 소헌왕후가 온수현(溫水縣)으로 행차할 때, 왕세자와 여러 왕자들이 호종하여 왕궁이 비게 되었는데, 세종이 임영대군에게 왕궁에 남아서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경복궁을 지키게 하였다. 세종은 임영대군이 친형 수양대군(首陽大君)처럼 무사다운 기질이 있는 것을 사랑하여, 훌륭한 무장(武將)으로 키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1441년(세종 23) 8월에 임영대군이구는 서형 화의군(和義君)이영(李瓔)과 함께 종[奴] 매읍금(每邑金)을 시켜, 창기(娼妓) 두 사람에게 남복(男服)을 입히고 도롱이[衣]를 두르게 하여, 어둠을 타서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다가 문지기에게 들켜서 붙잡혔다. 매우 진노한 세종은 임영대군과 화의군의 직첩과 과전(科田)을 거두었다. 또 두 여자는 장(杖) 1백 대에 처하여 제주(濟州)로 내쫓아 관비(官婢)로 삼도록 하였다.

1444년(세종 26) 어머니 소헌왕후가 돌아가자, 세종은 이구를 다시 임영대군으로 삼았다. 그해 10월 세종의 명령을 받고 임영대군은 친형 안평대군과 함께 대모산(大母山)의 산역(山役)하는 곳으로 가서 세종의 묻힐 수릉(壽陵) 터를 살펴보았다. 1445년(세종27) 3월 세종이 임영대군과 금성대군에게 화포(火砲)를 제작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1447년(세종29) 2월 세종은 임영대군과 영응대군에게 종성과 온성의 경재소를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1449년(세종 31) 10월 세종은 임영대군과 도승지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관음정근(觀音精勤)을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게 하였다. 세종은 후반기에 불교에 깊이 신봉하였으므로, 불공(佛供)을 드릴 때에 왕자들을 동원하였다.

문종 · 단종 · 세조 시대의 활동

1451년(문종 1) 문종이 임영대군이구에게 화차(火車)를 제작하게 하여 2월에 서울 및 평양 · 안주 등에서 쓰도록 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돌아가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단종 1)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권람·한명회·홍달손(洪達孫)과 함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킬 때 임영대군은 정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정변이 성공한 이후에 세종의 왕자 8대군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계유정난>을 지지하였다. 1454년(단종 2) 1월 창덕궁(昌德宮)에서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의 왕비를 간택하였다. 이해 5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의 공신을 비롯하여 4공신을 거느리고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단종에게 풍정(豊呈)을 올렸는데, 이때 임영대군이 양녕대군과 함께 종친들을 거느리고 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종친들은 수양대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갈리었는데, 임영대군은 수양대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므로, <계유정난> 이후에 종친의 실세로 등장하여, 그 자손들이 크게 등용되었다.

1455년 윤6월 단종이 양위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서 세조가 되자, 이에 반대하는 ‘역모(逆謀)’가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세조는 처형된 ‘역적(逆賊)’들의 집과 전토 등을 종친과 공신에게 하사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었는데 1457년(세조 3) 3월 성삼문의 당진(唐津) 전지 · 양주(楊州) 전지를 하사받았다. 세조 시대에는 종친의 실세로서 세조가 사냥을 하거나 활쏘기를 구경하는 관사(觀射)를 할 때 주로 입시(入侍)하였고, 또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접대하는 일도 하였다. 1457년(세조 3) 4월 내시부(內侍府)판사(判事) 전균(田畇)이 홍제원(弘濟院)에서 명(明)나라로 돌아가는 사신을 전송할 때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과 의창군(義昌君)이공(李玒)과 함께 전별연(餞別宴)에 참석하였다. 1461년(세조 7) 유구국(琉球國) 사신을 접대하였다. 1469년(예종 1년) 1월 21일 병으로 졸하였는데, 향년이 52세였다.

출중한 무예와 화포 제작의 공훈

『예종실록(睿宗實錄)』의 「임영대군 이구 졸기」에서 “무예(武藝)가 절륜(絶倫)하였다.”고 칭찬할 만큼 무예가 뛰어났었다.(『예종실록』 예종 1년 1월 21일 「임영대군 이구 졸기」) 1443년(세종 15) 3월 세종이 도진무(都鎭撫)훈련원(訓鍊院)제조(提調)를 불러서 군사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방법을 논의할 때 임영대군과 진평대군(晉平大君: 세조)에게 명하여, 사복관(司僕官) 중에서 말을 잘 타는 자들을 거느리고 먼저 이 방법을 시험하게 하고, 그 의견을 들어서 그 방법을 논의하여 정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5년 3월 11일) 이를 보면, 세종의 8왕자 중에서 임영대군과 수양대군이 가장 무사다운 기질을 타고나서 무예에 출중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462년(세조 8) 1월 세조가 백악산(白岳山)의 표범을 추적하였는데, 임영대군이 표범을 추적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또 이 해 강무(講武) 때에 종친과 신하들을 좌·우로 나누어서 활을 쏘아 승부를 겨루도록 할 때 임영대군이 거느린 쪽이 승리하여 임영대군이 아마(兒馬) 1필을 하사 받았다.

고려 말에 화약(火藥)의 제조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세종 시대 화포의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화포에 화살을 여러 개 장전하여 발사하는 화통전(火筒箭), 즉 신기전(神機箭)이 크게 발전하였다. 1445년(세종27) 3월 세종이 임영대군과 금성대군에게 화포를 제작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세종 때 ‘4전 화통(四箭火筒)’, ‘8전 화통(八箭火筒)’을 개발하는 데에 임영대군의 역할이 매우 컸다. 기존의 화포에서 발사된 화살은 2백보에서 5백 보(步)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때 제작한 화포는 화살이 4백 보에서 1천 5백 보까지 이르렀다.(『세종실록』 세종 27년 3월 18일, 『세종실록』 세종 30년 9월 13일)

1451년(문종 1) 2월 문종이 임영 대군에게 명하여 화차를 개조하게 하였다. 그 화차 위에 가자(架子)를 설치하고 중형 신기전 1백 개를 꽂아 두거나, 혹은 ‘4전 총통(四箭銃筒)’ 50개를 꽂아 두고 불을 심지에 붙이면 연달아 차례로 발사하게 설계되었는데, 이 제도는 모두 문종이 창안하여 지시하고 임영대군이 제작한 것이다.(『문종실록』 문종 1년 2월 13일) 이것이 임진왜란 때 이장손(李長孫)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 발전하였다. 1467년(세조 13) 7월 세조가 임영대군과 신숙주 · 구치관(具致寬) · 홍윤성(洪允成) 등에게 명하여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새로 만든 총통전(銃筒箭)을 쏘아서 시험하게 하였다.

성품과 일화

『예종실록』의 「임영대군 이구 졸기」에서는 그의 성품에 관하여 “천성이 활달하고, 사물의 이치에 정통하였다. 무예가 절륜한데다가, 또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하였으므로, 그의 의논은 보통 정도를 뛰어넘어서, 세조가 일찍이 유자(儒者)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세조를 섬기며 모든 조정 정사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해를 세조에게 계달(啓達)치 않는 바가 없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세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항상 검약한 것을 좋아하고, 재산을 경영하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지성(至誠)으로 접대하고 조금도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 하였다.

세조는 “임영대군은 질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옷을 화려하게 꾸민 것을 입지 않으니,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다.”라고 평하고 이를 사관에게 역사에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內蓀洞)에 있다. 안평대군이용의 글씨로 집자했다고 전하는 묘표가 남아 있다.[「임영대군 구 묘표(臨瀛大君璆墓表)」] 묘 동쪽에 150m 떨어진 곳에 사당이 있다. 첫째 부인 의령 남씨는 남지의 딸인데, 병이 있어 이혼하였고, 자녀는 없다. 둘째 부인 제안부부인(濟安府夫人)은 전주 최씨로서 우의정최승녕의 딸이다. 최승녕은 찬성(贊成)최사강(崔士康)의 아들인데, 그 누이 중 하나는 태종의 서출 제 2왕자 함녕군(諴寧君)의 부인(夫人)이고, 다른 누이는 세종의 적출 제 6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부인이다. 또 『영조실록』에 의하면, 문종에게 최공빈(崔恭嬪)이라는 후궁(後宮)이 있었다고 하는데, 최승녕의 손녀라고 한다.

임영대군이구는 최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5남 2녀를 두었다. 1자는 오산군(烏山君)이주(李澍)이고, 2자는 구성군(龜城君)이준(李浚)인데, <이시애(李施愛) 반란>을 평정하고 29세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예종 때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3자는 정양군(定陽君)이순(李淳)이고, 4자 팔계군(八溪君)이정(李淨)인데, 덕성정(德城正) 이민(李敏)의 양자로 갔으며, 윤여필(尹汝弼)의 사위가 되었다. 5자는 환성군(歡城君)이징(李澄)이다. 1녀 중모현주(中牟縣主)는 신승선(愼承善)의 처가 되어서, 좌의정신수근(愼守勤)과 연산군(燕山君)의 왕비 신씨(愼氏)를 낳았다. 2녀 청하현주(淸河縣主)는 안유건(安友鶱)의 처이다. 서출 자녀는 4남 3녀이다. 1자는 영양부정(英陽副正) 이함(李涵)이고, 2자는 단계부정(丹溪副正) 이인(李潾)이며, 3자는 윤산부정(輪山副正) 이탁(李濯)이고, 4자는 옥천부정(玉泉副正) 이옥(李沃)이다. 1녀는 김풍공(金豊公)의 처이고, 2녀는 전윤식(田允植)의 처이며, 3녀는 권형(權衡)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계전집(沙溪全集)』
  • 『순암집(順菴集)』
  • 『약천집(藥泉集)』
  • 『청음집(淸陰集)』
  • 『고산유고(孤山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