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의(成安義)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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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안의 |
한글표제 | 성안의 |
한자표제 | 成安義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정보(精甫) |
호 | 부용당(芙蓉堂)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1년(명종16) |
사망 | 1629년(인조7) |
본관 | 창녕(昌寧) |
주거지 | 경상도 창녕, 경상도 영천(榮川)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영천(榮川) 석현(石峴)의 묘원(墓原) |
증조부 | 성익동(成翼仝) |
조부 | 성윤(成胤) |
부 | 성적(成績) |
모_외조 | 장연노씨(長淵盧氏): 노사영(盧士英)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장수황씨(長水黃氏): 황근(黃瑾)의 딸 (둘째부인)선성김씨(宣城金氏): 김계선(金繼善)의 딸 →(자녀)5남 5녀 (셋째부인)인천이씨(仁川李氏): 이구(李衢)의 딸 |
자녀 | (1자)성이침(成以忱) (2자)성이각(成以恪) (3자)성이성(成以性) (4자)성이념(成以恬) (5자)성이항(成以恒) (1녀)이외(李巍)의 처 (2녀)박요(朴炓)의 처 (3녀)이천표(李天標)의 처 (4녀)이문한(李文漢)의 처 (5녀)권도(權鍍)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안의(成安義) |
총론
[1561년(명종16)∼1629년(인조7) = 69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원래 주거지는 창녕이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영천(榮川: 영주)으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참봉성적(成績)이고, 어머니 장연노씨(長淵盧氏)는 호조 참의노사영(盧士英)의 딸이다.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와 선조 후반기의 활동
1591년(선조24)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31세였다. 이듬해 부인의 병 때문에 고향에 돌아갔다가 <임진왜란>을 만나 창녕 고을에서 충의위(忠義衛)성천희(成天禧) 등과 함께 의병을 1천여 명을 모집하고, 이웃 고을 현풍(玄風)에 사는 유학(幼學)곽찬(郭趲) 등이 모집한 의병 6, 7백 명과 합세하여,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각 지역에서 복병 전술로써 왜적들과 싸워 낙동강 좌안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곽재우가 왜적의 수급(首級)을 계속하여 바치자, 조정에서 창녕 지방의 의병으로 성천희를 가장(假將: 임시 대장)으로, 조열(曺悅)을 별장(別將)으로, 정자(正字)성안의를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경상도관찰사백암(栢巖)김륵(金玏)의 막하에 들어가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그가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김륵이 기특하게 여겨서, 때마침 상처(喪妻)한 그에게 자기 친형의 손녀를 중매하여 손녀사위로 삼았다. 전쟁 중에 그는 양친을 영천(榮川)의 처갓집으로 피난시켰는데, 친척 중에 많은 사람들도 따라서 영천으로 피난 가서 그 처갓집에 의지하여 살았다. 1594년(선조27) 봉상시(奉常寺)참봉(參奉)을 거쳐 교서관에 들어가서 정자(正字) · 저작(著作) · 박사(博士)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고, 승문원 교검(校檢)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낭관(郞官)을 거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 이때 난리를 당하여 사무가 매우 번잡하였으나 일에 따라 잘 처리하였으므로 행정능력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1596년(선조29)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옮겼다. 1598년(선조31) 병조 낭관으로서 영남 지방의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군량미를 원활히 공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明)나라 군사들의 요구에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대응하여 많은 일을 즉시 처리하니,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재능을 여러 차례 칭찬하였다. 1600년(선조33) 전쟁 중에 공적이 매우 많았으므로, 조정에서 요직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려고 외직을 자청하여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갔다. 1604년(선조37) 부모의 상고(喪故)를 연달아 당하여 고향 창녕으로 돌아가서 상례를 치르고, 1607년(선조40)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갔다.
광해군 · 인조 시대 활동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北人)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는 남원부사로 있다가 1611년(광해군3) 관례에 따라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옮겼다. 1612년(광해군4) 의금부에서 광주(光州)에 공문을 보내 범죄자를 체포하여 보내게 하였는데, 압송하는 도중에 범죄자가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그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때 광해군의 정치가 점차 혼란스러워지고, 북인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세상에 뜻이 없어서 처가 영천으로 돌아가서, 13년 동안 은거하며 부근의 일사(逸士)들과 교유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이 집권하자,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다가, 상의원(尙衣院) · 봉상시(奉常寺)의 정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를 공주(公州)까지 호종(護從)하였는데,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그가 연로하여 바다를 건너가기가 어려울까봐 걱정하였는데, 그는 “신하된 자의 의리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다.” 하고, 바로 임지에 부임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628년(인조6)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었는데, 그는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사헌부에서는 그가 우부승지의 임무에 맞지 않는다고 체차를 청하였으나 인조는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다시 아뢰자 인조가 따랐다. 1629년(인조7) 2월에 영천의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9세였다.
저서로는 『부용당선생일고(芙蓉堂先生逸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안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하여 아는 것이 많았다.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하면서 용모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걸출한 인물로 추앙하였다. 그는 빈객과 교제할 때는 진실함과 미더움을 근본으로 하여 상대방을 속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구차하게 먼저 남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아도 남들이 먼저 그를 흠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특히 일을 계획하는 데에 능하여 관리로 있을 때 일을 맡아 해결하는 데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영천(榮川) 동쪽 석현(石峴)의 묘원(墓原)에 있고,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갈암집(葛庵集)』 권25) 첫째 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황근(黃瑾)의 딸이고, 둘째 부인 선성김씨(宣城金氏)는 호조 참판김계선(金繼善)의 딸인데, 자녀는 5남 5녀를 두었다. 3남 성이성(成以性)이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그 아버지인 성안의는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경상도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 ·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난중잡록(亂中雜錄)』
- 『속잡록(續雜錄)』
- 『서애집(西厓集)』
- 『갈암집(葛庵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학봉전집(鶴峯全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송암집(松巖集)』
- 『인재집(訒齋集)』
- 『한강집(寒岡集)』
- 『한음문고(漢陰文稿)』
- 『현주집(玄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