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權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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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4년(선조37)∼1675년(숙종1) =72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시대의 문신. 자는 자고(子高)이고, 호는 우곡(愚谷)이다. 본관은 안동인데, 우승지권확(權鑊)의 아들이고, 안사렴(安士斂)의 외손자이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28년(인조6)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병조 좌랑을 거쳐서,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 병환을 돌보기 위해서 자청하여 면직되었다. 1636년(인조14)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정랑을 거쳐, 지평(持平)으로 전직되었다. 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와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다시 장령(掌令)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인조 말년에 군자감(軍資監)정(正),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을 거쳐서,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효종 시대의 활동

1651년(효종2) 종부시(宗簿寺) 정에 임명되었다가,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 성균관 사예(司藝)에 전직되었다. 1652년(효종3)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군자감 정, 우통례(右通禮)로 옮겼고, 곧이어 장령 · 헌납 · 필선(弼善)으로 옮겼다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1656년(효종7) 병조 참의와 좌승지를 거쳐서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가, 조정으로 들어와서 형조 참의 ·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효종 때 승지로서 효종의 북벌 계획을 측근에서 도왔다.

현종 시대 복제 문제

1660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의 복제(服制)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다. 그는 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설(期年說)을 주장하면서,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하다가 파면되었다. 1663년(현종4)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병조 참의 · 우승지 · 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1666년(현종7)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과 공조 참판을 역임하고,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무덤과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화접동(花蝶洞)에 있는데, 오도일(吳道一)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서파집(西坡集)』 권23)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서파집(西坡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