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중(姜弘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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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홍중 |
한글표제 | 강홍중 |
한자표제 | 姜弘重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임보(任甫) |
호 | 도촌(道村)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7년(선조10) |
사망 | 1642년(인조20) |
본관 | 진주(晉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고양(高陽) 용보원(龍步院)의 선영(先塋) |
증조부 | 강온(姜溫) |
조부 | 강사필(姜士弼) |
부 | 강정(姜綎) |
모_외조 |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인지(洪仁祉)의 딸 |
처_장인 | 파평윤씨(坡平尹氏): 윤기정(尹起禎)의 딸→(자녀)3남 2녀 |
자녀 | (1자)강급(姜*) (2자)강전(姜琠) (3자)강욱(姜頊) (1녀)정두경(鄭斗卿)의 처 (2녀)이석형(李錫亨)의 처 |
유명자손 | 강석로(姜碩老), 강석구(姜碩耈), 강석빈(姜碩賓), 강석신(姜碩臣)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홍중(姜弘重) |
총론
[1577년(선조10)~1642년(인조20) = 66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임보(任甫), 호는 도촌(道村)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강회중(姜淮仲), 강징(姜澂), 강자평(姜自平) 계통 집안으로서 좌승지(左承旨)강연(姜綎)의 아들이며,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광해군 시대의 활동
1606년(선조39) 과거에 급제하여, 1609년(광해군1)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예조좌랑·호조좌랑·형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1613년(광해군5)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북인(北人)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재상 이항복(李恒福)을 무고하여 중죄에 빠뜨리려고 하였으므로, 그가 홀로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다가 파직되었다. 1617년(광해군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에 임명되었고, 성균관전적(典籍)을 거쳐서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상의원(尙衣院)정(正)으로 전직하였다. 통례원통례(通禮)에 임명되었을 때 서궁(西宮)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홀로 사은숙배(謝恩肅拜)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당시 여알(女謁: 상궁 김씨)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뇌물이 성행하였는데, 그는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선발되었지만 한번도 뇌물을 보내지 않았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북인의 범죄 사실을 심문하는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되어, 대북파(大北派) 사람들을 취조할 때 잘못된 것을 조사하고 사실을 캐어내어 바로잡은 것이 많았다.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갔다가 승문원판교(判校)를 지냈다. 1624년(인조2) 회답(回答)하는 통신사(通信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관백(關伯)이 금은과 잡화 등을 폐백으로 주었으나, 그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므로 왜인들이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군자감(軍資監)정(正)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일본의 화포술(火砲術)을 도입하여 우리 군사가 실용하도록 노력하였다. 홍주목사(洪州牧使)·형조참의를 거쳐, 병조참의로 전직하였다.
1630년(인조8)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1631년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 1632년(인조10) 인목대비가 승하하자,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일을 맡아서 장례를 치른 뒤에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는데, 1633년(인조11)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하여 영병(營兵)에 일본조총(鳥銃)을 공급하고, 화약을 지급할 것을 주청하였고, 또 포수(砲手)의 훈련을 철저히 할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연안부사(延安府使)·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총관(摠管) 등을 역임하였다. 1635년(인조13) 요동의 한족(漢族)들이 가도(椵島)를 점령해서 조선의 서도(西道) 지방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는데, 그가 명(明)나라 도독(都督)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에 자주(咨奏)를 보내어 폐단을 줄이도록 주선하니, 우리 백성들이 비로소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나갔다가, 의금부(義禁府)동지사로 옮겼으며, 얼마 뒤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어 서울의 집으로 돌아왔다. 1642년(인조20)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66세였다.
묘소와 성품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용보원(龍步院)의 선영(先塋)에 있으며,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강홍중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자기를 간약(簡約)하게 단속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며, 깨끗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남과 교류를 일삼지 않았다. 항상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기뻐 날뛰다가 패가망신하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하고, 또 말하기를, “재주는 청렴·빈한(貧寒)보다 강할 수 없다.” 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동사록(東槎錄)』
- 『동사일기(東槎日記)』
- 『속잡록(續雜錄)』
- 『해사일기(海槎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