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영(具壽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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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6년(세조2)~1523년(중종18) = 68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중종(中宗) 시대의 척신(戚臣). 자는 미숙(眉叔)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구치홍(具致洪)의 아들이고, 영의정(領議政)구치관(具致寬)의 조카이다. 세종(世宗)의 막내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의 사위다.

성종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자세가 수려하였으므로, 1467년(세조13) 나이 12세 때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가 되었다. 궐내(闕內)에 입직(入直)하면서, 잠저(潛邸)에 있던 성종(成宗)을 시종(侍從)하게 되어, 두 사람이 서로 친해졌다.

1469년(성종즉위) 성종이 즉위할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되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중추부첨지사(僉知事)로 승진하였다. 성종이 편전에서 그를 보고 말하기를, “옛날 함께 놀던 일을 생각하면 마치 눈앞에 선한 것 같다.” 하고, 어의(御衣)를 하사하였다. 1478년(성종9)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중추부지사(知事)에 임명되었는데, 이로부터 여러 관사의 제조(提調)도총관(都摠管)을 여러 번 역임하였다. 성종 말년에 가뭄이 심하자, 성종이 그에게 경회루(慶會樓) 연못가에서 비를 빌라고 명하여 3일 동안 신명(神明)에게 정성을 드리니, 과연 큰 비가 왔기 때문에 임금이 궁온(宮醞)과 어의(御衣)를 하사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502년(연산군8) 종1품상 숭정대부(崇政大夫)돈령부(敦寧府)판사(判事)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판사를 겸임하였다. 그는 음악의 악률에 재능이 있었는데, 1505년(연산군11) 장악원(掌樂院)제조에 임명되어, 흥청(興淸)·운평(運平)·광희(光熙)의 기녀를 모아서 악률(樂律)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연산군의 유락(遊樂)행위를 돕게 하였다. 1506년(연산군12)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제도 통찰사(諸道統察使)와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겸임하였다. 그 아들 구문경(具文璟)은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徽愼公主)와 혼인하여 능양위(綾陽尉)가 되었다. 연산군의 정사(政事)가 더욱 문란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임금을 멀리 하다가 연산군의 비위를 거스려서, 그의 두 사위가 죽임을 당하고 가산은 적몰되었는데, 두 딸마저 종이 되었으나, 구수영 자신은 간신히 화를 면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중종(中宗)이 반정(反正)을 할 때, 그가 앞장서서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후 얼마 있다가 경연(經筵)영사(領事)를 겸임하게 되었으나, 구수영이 고사(固辭)하여 면직되었다. 1507년(중종2) 모친상을 당하여 복제가 끝난 다음에, 대간(臺諫)에서 그의 숭품(崇品)이 모두 연산군 때 남발한 것이라고 탄핵하여, 결국 탈급낙직(奪給落職)되었다. 1510년(중종5) 중종이 그의 옛날 공훈을 생각하여 도로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자급을 주고 다시 능천군(綾川君)에 봉하였다. 그러나 대간에서 전의 일을 가지고 다시 논핵하여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평구(平丘)의 강촌(江村)에 별장을 지어 놓고 실직(失職)에 전혀 개의치 않은 채 15년 동안 한가하게 살다가, 1523년(중종18) 병으로 죽으니, 향년 68세였다.

묘소와 성품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부인 길안현주(吉安縣主: 영응대군 이염의 딸)와 함께 묻히었다.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성품이 자상하고 유순· 겸손하여 비록 한 시대의 척리(戚里) 중에서 부귀영화가 대단하였으나, 마음 편히 조용하게 스스로를 지켜 교만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또 사치스럽거나 화려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성색(聲色)이나 사냥놀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여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친가(親家)에 문안드리는 것을 폐지하지 않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중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해동야언(海東野言)』
  • 『백사집(白沙集)』
  • 『상촌집(象村集)』
  • 『택당집(澤堂集)』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 『점필재집(佔畢齋集)』
  • 『음애일기(陰崖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