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엄(尹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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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6년(중종 31)∼1581년(선조 14) = 46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 서화가. 호조 좌랑(佐郞)을 지냈다. 자(字)는 사숙(思叔)이고, 호(號)는 송암(松巖) 또는 송암(松庵)이다. 아버지는 성균 생원(生員)윤지함(之諴)이고, 어머니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참판남세웅(南世雄)의 딸이다. 아버지가 영평위(鈴平尉)윤섭(尹燮)의 양자가 되어, 성종의 제11 서녀인 정숙옹주(靜淑翁主)가 양조모가 된다.

선조 시대 활동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고, 9년 뒤인 1572년(선조 5) 나이 37세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방목』]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 이듬해인 1573년(선조6) 할머니인 정숙옹주의 상(喪)을 당하여 3년 상을 치렀다. 3년 뒤에는 승문원의 정자(正字)저작(著作)을 거쳐서, 봉상시(奉常寺)직장(直長)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가 되었고,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다.[『지천집(芝川集)』 권4 「승의랑 행 호조좌랑 윤공 묘갈명(承議郞行戶曹佐郞尹公墓碣銘)」]

그 사이에 두 번이나 천거로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성균관 전적에서 호조 좌랑으로 이임되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장수 현감(長水縣監)에 임명되어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3년이 지난 후, 1581년(선조 14) 병이 나자, 여러 차례 사장(辭狀)을 올리고 해직을 청하였으나 관찰사가 허락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상소를 올려 유임을 청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동쪽 교외의 미사리(彌沙里)에 터를 잡고 꽃과 나무를 심고 아들 손자를 가르치면서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9일에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 46세이다.[『지천집』 권4 「승의랑 행 호조좌랑 윤공 묘갈명」]

윤엄은 서화(書畵)에 능하고 필법(筆法)에 조예가 깊었다. 서화를 감식하는 안목이 높아 고금 서화의 판별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유작으로 「화조도(花鳥圖)」, 「원록도(猿鹿圖)」, 「노저게로도(蘆渚憩鷺圖)」등이 있다.

일화

윤엄의 그림은 명대(明代) 초기 화조화(花鳥畵)의 일인자인 여기(呂紀)의 정교하고 장식적인 화풍과 남송대(南宋代) 원체화(院體畵)의 서정성을 반영하고 있다. 윤엄의 사돈이면서 관각문학(館閣文學)의 3걸(三傑)가운데 한 사람인 황정욱(黃廷彧)이 쓴 윤엄의 비문에서 그의 서화와 필법, 그리고 그의 일상에 대한 것을 엿볼 수 있다.[『지천집』 권4 「승의랑 행 호조좌랑 윤공 묘갈명」] 그는 평소에 방의 벽면 좌우에 도서(圖書)를 걸어놓고 그 가운데 앉아 종일토록 시가(詩歌)를 읊으면서 인간 세상의 기호(嗜好) 따위는 절대로 생각 하지 않았다. 때로는 글을 쓰는 것으로 소일 하는데, 필세(筆勢)는 굳세면서도 단아하여 고기(古氣)에 핍진하였고, 그림의 품격이 그 묘(妙)를 더하였다. 그는 서화를 감식하는 안목이 높아 누구의 작품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금(古今)의 서화(書畵)도 한번 보면 작자를 바로 판별해냈다. 때로는 병풍을 펼쳐놓고 산수(山水)를 논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아득히 그 속으로 날아드는 듯한 감상을 갖게 하였다. 누가 그림을 청하면 즉시 붓을 들어 고목에 핀 매화 몇 줄기를 그리는데 잠깐 사이에 서너 폭을 그리면 가지가 옆으로 비껴 영롱한 것이 세속을 벗어나 조화(造化)를 빼앗은듯하다고 극찬하였다.

윤엄의 할머니는 1493년 (성종 24) 정숙옹주인데, 그 어머니는 홍숙의(洪淑儀)로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정숙옹주는 1503년(연산군 9) 11세의 나이에 영평위윤섭에게 출가하였으나 결혼 한지 13년이 되는 1516년(중종 11) 나이 24세에 남편이 돌아가면서, 이후 58년을 과부로 지냈다. 옹주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남편의 조카인 윤지함을 후사로 삼았다. 윤지함은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573년(선조6) 향년 81세를 일기로 정숙옹주가 세상을 떠났는데, 윤엄의 아버지인 윤지함이 먼저 돌아갔으므로, 옹주의 손자인 윤엄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할머니의 상을 주관하였다.[『간이집』] 일반적인 상례(喪禮)에 의하면 손자인 윤엄은 할머니인 정숙옹주의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1년의 상기를 마치면 되지만, 아버지인 윤지함이 돌아가고 그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상을 치르면서 3년복을 입었다. 윤엄이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인 정숙옹주의 손에 자라면서 할머니에게 부모와 같은 애틋한 정이 있었으므로, 3년상을 치른 것이 아닌가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안산(安山)의 수리산(修理山)에 있고, 황정욱(黃廷彧)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지천집(芝川集)』 권4 「승의랑 행 호조좌랑 윤공 묘갈명(承議郞行戶曹佐郞尹公墓碣銘)」]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판서김주(金澍)의 딸인데, 5남 2녀를 낳았다. 1남은 윤민철(尹民哲)이고, 2남은 윤민준(尹民俊)이며, 3남은 윤민헌(尹民獻)이고, 4남은 윤민일(尹民逸)이며, 5남은 윤민각(尹民覺)이다. 딸은 황혁(黃赫)과 이학기(李學基)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간이집(簡易集)』
  • 『상촌집(象村集)』
  • 『오음유고(梧陰遺稿)』
  • 『인재집(忍齋集)』
  • 『지천집(芝川集)』
  • 『오음유고(梧陰遺稿)』
  • 『청강집(淸江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서애집(西厓集)』
  • 『월사집(月沙集)』
  • 『학곡집(鶴谷集)』
  • 『낙전당집(樂全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