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일(尹民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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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민일 |
한글표제 | 윤민일 |
한자표제 | 尹民逸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인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현세(顯世) |
호 | 지산(芝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4년(명종 19) 윤2월 20일 |
사망 | 1635년(인조 13) 4월 25일 |
본관 | 파평(坡平)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안산(安山) 당정리(唐井里) |
증조부 | (양증조부)윤섭(尹燮) (생증조부)윤엽(尹燁) |
조부 | 윤지함(尹之諴) |
부 | 윤엄(尹儼) |
모_외조 | 안동 김씨(安東金氏) : 김주(金澍)의 딸 |
형제 | (형)윤민철(尹民哲), 윤민준(尹民俊), 윤민헌(尹民獻) (동생)윤민정(尹民程) |
처_장인 | (첫째 부인)평산 신씨(平山申氏) : 신잡(申磼)의 딸 →(자녀)1녀 (둘째 부인)창원 황씨(昌原黃氏) : 황대임(黃大任)의 딸 →(자녀)1남 2녀 (셋째 부인)풍천 임씨(豊川任氏) : 임경운(任慶雲)의 딸 →(자녀)무후 |
자녀 | (1남)윤두(尹紏) (1녀)현감 김홍익(金弘翼)의 처 (2녀)생원 이장백(李長白)의 처 (3녀)임공(任鞏)의 처 (서1남)윤치(尹緻) (서2남)윤작(尹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민일(尹民逸) |
총론
[1564년(명종 19)∼1635년(인조 13) = 72세]. 조선 후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과 동래부사(東萊府使) 등을 지냈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자는 현세(顯世)이고, 호는 지산(芝山)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의(參議)윤엄(尹儼)이고,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대사헌(大司憲)김주(金澍)의 딸이다. 형 윤민헌(尹民獻)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595년(선조 28)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96년(선조 29) 성균관에 들어가서,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典籍)과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승진하였다.[『노서유고(魯西遺稿)』 권17 「통정대부돈녕부도정증가선대부이조참판윤공묘표(通政大夫敦寧府都正贈嘉善大夫吏曹參判尹公墓表)」 이하 「윤민일묘표」로 약칭] 1601년(선조 34) 병조 좌랑(左郞)과 예조 좌랑을 각각 역임하고, 1601년(선조 34) 형조 정랑(正郞)을 거쳐,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4년 1월 15일, 선조 34년 11월 6일, 선조 34년 11월 16일, 선조 34년 11월 20일]
1602년(선조 35)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윤민일묘표」]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성혼을 탄핵하여 죽은 성혼의 관직을 추탈(追奪)하려고 하였으므로, 윤민일은 이에 반대하다가, 마침내 성혼의 문하생으로서 사헌부의 탄핵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여, 왕에게 대간의 직책을 교체해 달라고 상소하고,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그 직후에 윤민일은 수원판관(水原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그해 12월 사헌부 지평최유원(崔有源)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습이 근래 더욱 심하여졌는데, 수원판관윤민일 등이 상관을 능멸하였다고 하며, 또 윤민일은 정사(政事)를 하리(下吏)들에게 맡겨서, 관청의 일이 날로 허술해졌다고 하니, 파직시키소서.”라고 탄핵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35년 4월 1일, 선조 35년 12월 6일] 이것은 북인 이이첨(李爾瞻)이 대간을 사주하여 수원판관윤민일이 상관인 수원부사(水原府使)의 명령을 잘 받들지 않는다고 탄핵하게 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1603년(선조 36) 9월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정인홍의 본가(本家)가 경상도 합천 땅에 있었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선조실록』선조 36년 9월 5일] 그리고 1604년(선조 37) 3월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4월 사헌부가 아뢰기를, “개성부경력윤민일은 합천군수에 임명되었을 적에 기한이 지나도록 부임하지 않았으므로, 준기불서(準期不敍 : 임기 기한 안에 임명하지 않음)의 규정을 적용해야 마땅할 것인데, 곧바로 본직에 제수하였으니, 교체하소서.”라고 하였으므로, 선조는 개성부경력윤민일을 파직하였다.[『선조실록』선조 37년 3월 22일, 선조 37년 4월 6일]
선조 말기에 대북(大北)정인홍과 소북(小北)유경영(柳慶永)이 번갈아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을 탄압하였으므로, 그는 내직(內職)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서천군수(舒川郡守)와 개천군수(价川郡守)를 차례로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칭송하였고, 그가 떠난 뒤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그 뒤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와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직하여,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대북 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廢妃)시키기 위하여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는 서인들이 모두 관직을 떠났다. 그러나 윤민일은 외직으로 나가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이 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 태상시(太常寺) 첨정(僉正)과 장악원(掌樂院) 첨정을 지냈다.[「윤민일묘표」] 1618년(광해군 10) 왜관(倭館)에서 일본 대마도 상인(商人)과 동래(東萊)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수세관(收稅官)에 임명되어 동래에 내려갔다가, 곧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윤민일묘표」] 이에 대하여 윤민일이 수세관으로 있으면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 조정에 뇌물을 주고 동래부사 자리를 얻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윤민일은 곧 스스로 면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윤민일묘표」]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임기가 차서 교체되자, 나이가 60세가 넘었다고 하여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뒤에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임명되자, 부임하여 정사에 힘쓰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후 다시 풍기군수(豊基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나이가 많다고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윤민일묘표」]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여 인조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가자, 달려가서 문안을 드렸다. 그해 가을 돈녕부 도정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사직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5년 12월 6일] 이어 1628년(인조 6) 5월 총병전문안사(摠兵前問安使)가 되었고, 1629년(인조 7) 7월 절충장군 행(行) 충무위부사맹(忠武衛副司猛)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5월 21일, 인조 7년 7월 11일] 이후 고향 안산(安山)으로 돌아와서 6년 동안 한가로이 지내다가, 1635년(인조 13) 4월 25일 노병으로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2세였다.[「윤민일묘표」]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온화하고 뜻이 담박하였다.[『선조실록』선조 35년 12월 6일] 자질이 순일(純一)하여 학문에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실을 삼가고 조심하여 평생에 충성스럽고 순박하다고 스스로 자부하였다. 그러나 교언영색(巧言令色)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문장은 족히 남보다 우수했는데도 당세에 드러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재능은 족히 높은 관직에 오를 만하였으나, 실지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다.[「윤민일묘표」]
본래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부유하게 자랐으나, 그는 일찍부터 글에 눈을 떠서 셋째 형인 윤민헌과 더불어 경쟁하면서 글을 읽었는데, 몇 년이 되지 않아 배움이 크게 향상되었다. 나이가 장성하자, 형 윤민헌과 함께 분발하고 일어나서 성혼을 찾아가서 유학하였다. 이때 순박하고 진실하게 학문을 닦아서 충성과 신의를 지키는 높은 뜻을 터득하고, 종신토록 이를 받들고 지키려고 노력하였다.[「윤민일묘표」]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안산(安山) 당정리(唐井里)에 있는데, 윤선거(尹宣擧)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윤민일묘표」] 처음에는 안산(安山) 무등곡(無等谷) 구리(舊里) 앞 산기슭에 장사지냈었는데, 이조 판서를 지낸 조카 윤강(尹絳 : 윤민헌의 아들)이 그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동쪽 당정리(唐井里)의 언덕에 다시 터를 잡아서, 1649년(효종 즉위년) 12월에 이장하였다. 첫째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서 따로 장사를 지냈는데, 그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사자암(獅子巖) 친정아버지의 묘소 곁에 있다. 둘째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와 셋째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윤민일의 무덤에 합장하였다.[「윤민일묘표」]
첫째 부인 평산 신씨는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신잡(申磼)의 딸이고, 둘째 부인 창원 황씨는 부호군(副護軍)황대임(黃大任)의 딸이고, 셋째 부인 풍천 임씨는 학생(學生) 임경운(任慶雲)의 딸이다. 윤민일은 장인 신잡의 공훈(功勳)에 힘입어 참판(參判)에 증직되고, 세 부인도 모두 숙부인(淑夫人)에서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신씨는 1녀를 낳았고 황씨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큰 사위 김홍익(金弘翼)은 현감이며, 둘째 사위 이장백(李長白)은 생원이고, 막내 사위는 임공(任鞏)이며, 아들은 윤두(尹紏)이다. 측실의 아들이 둘인데, 윤치(尹緻)는 현감을, 윤작(尹綽)은 각관(榷管)을 지냈다.[「윤민일묘표」]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동사록(東槎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촌집(美村集)』
- 『부상록(扶桑錄)』
- 『상촌집(象村集)』
- 『석주집(石洲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사류재집(四留齋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백강집(白江集)』
- 『학주전집(鶴洲全集)』
- 『희암유고(希菴遺稿)』
- 『석담집(石潭集)』
- 『경암집(絅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