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직(僧職)"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국가에서 승려에게 내려준 직임(職任).

개설

동아시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각국에서는 불교 교단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승정(僧政) 제도를 수립하였다.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승정이 국가의 공식적인 운영 체제 안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는 왕이 그 정점에 있었으며, 최종 인사권은 왕에게 있거나 혹은 왕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승관(僧官)이나 속관(俗官)에게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승관들에게 내려지는 직책이 승직으로, 대개 관직에 비견되었다.

내용 및 특징

삼국시대에 불교가 공인된 뒤 승단이 형성되면서 승직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라 진흥왕대에는 고구려 출신 승려 혜량(惠亮)을 국통(國統)으로 임명하였고, 선덕여왕대에 활동한 자장(慈藏)은 황룡사(黃龍寺)의 사주(寺主)인 동시에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불교 교단을 이끌었다. 9세기에는 국통 외에도 대통(大統)이나 주통(州統), 군통(郡統) 등 다양한 승직이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는 지방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직임도 있었다. 절에는 사찰의 운영과 관련된 승직 즉 삼강전(三綱典)도 존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승정이 확립되면서, 승직의 제수와 승관의 임무 등이 제도화되었다. 특히 승과(僧科)가 시행되면서, 승과를 통해 선발된 승려들은 대덕(大德)에서 시작해 연차 및 승려로서의 자질과 수행 정도에 따라 점차 승계(僧階)를 높여 가며 교단의 고위 승려로 성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승계에 따라 승직을 제수하였는데, 승록사(僧錄司)에 설치한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좌가승정(左街僧正)·우가승정을 비롯해, 사찰의 주지(住持), 내원당의 감주(監主), 판화엄종사(判華嚴宗事) 같은 각종 판사 등이 대표적인 승직이었다. 당대 최고의 고승에게 내려 준 명예직인 왕사(王師)국사(國師)도 승직의 하나였다. 승계 및 승직을 제수할 때는 일반 관원들의 관계(官階)관직(官職) 임명 절차와 마찬가지로, 대간(臺諫)서경(署經)을 거쳐 왕명에 따라 예부(禮部)에서 임명장인 고신(告身)을 발급하였다. 또한 승직을 가진 승려에게는 별사전(別賜田)을 지급하였고, 이들이 죄를 지은 경우에는 관원에 준하여 처벌하였다. 고려시대의 승직은 일종의 관직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초기에도 승려를 선발하여 승직을 제수하는 절차는 고려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종대에 불교 교단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한 뒤에도 3년마다 식년시로 승과를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선발된 승려에게는 대간의 서경을 거쳐 승직을 제수하였다(『세종실록』 20년 7월 9일). 또한 승과에 대한 규정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됨으로써, 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 승계와 승직을 제수하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3년에 한 번씩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렀다. 선종은 『전등록(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교종은 『화엄경(華嚴經)』과 『십지론(十地論)』을 시험 과목으로 하였으며, 양종에서 각각 30명을 선발하도록 했다. 승과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의 승계를 받았는데, 승차하여 중덕(中德)이 되면 국가에서 공인한 사찰의 주지로 임명될 수 있었다. 선종과 교종의 본사(本寺)에서 후보자를 추천하면 이조와 예조에서 협의를 거친 뒤 왕을 재가를 받아 임명하였으며,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조선전기의 선교양종 체제에서는 각 종단을 이끄는 판사(判事)가 가장 높은 승직이었다. 한편 1463년(세조 9)에 세조는 그동안 승직을 제수할 때는 수점(受點)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승직의 경우에도 이조에서 후보자 3명을 올린 뒤 왕의 낙점을 받아 임명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9년 6월 10일). 수점은 당상관을 임명할 때의 절차였으므로, 이것을 승직에 적용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세조 연간에는 승직을 고위 관직에 준하여 운영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조선전기의 양종 체제에서는 양종 또는 예조에서 주관하는 승과에 합격해야 승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일반 관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간의 서경과 왕의 재가를 받은 뒤 고신을 발급 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러한 승직 운영 상황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전기에는 승과를 통한 승계 및 승직 취득을 과거(科擧)를 통한 출사(出仕)와 같은 성격으로 인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승직을 가진 승려가 환속해 관직에 진출하려 하는 경우에는 시험을 면제해 주고 가계(家系)와 재능 및 인품 등을 살펴 관직을 주되, 재예(才藝)가 있는 사람은 이전의 승직을 고려해 벼슬을 내리도록 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 7년 6월 27일).

그 뒤 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승직을 제수하는 절차가 바뀌었다. 대간의 서경을 생략하고 바로 고신을 수여하도록 한 것이다(『성종실록』 9년 8월 4일). 이러한 변화는 승직이 이전만큼 중시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국가에서는 점차 역(役)에 대한 대가로 승직을 제수하였다(『성종실록』 14년 8월 14일). 한편 내원당이나 왕실원당 등의 관리를 담당한 승직인 지음(持音)의 경우에는 승과를 치르지 않고도 임명되어 인근 사찰까지 통령하는 임무를 부여받기도 하였다(『명종실록』 6년 8월 13일).

이처럼 성종대 이후에는 승직을 제수하는 원칙이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는 고려시대 이래의 전통이자 『경국대전』에 의거해 운영되던 승정이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 전기에 유교에 입각한 국가 운영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가운데, 불교 교단이 위축되고 국가의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기 시작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중종대에 선교양종이 혁파된 뒤에는 승계와 승직을 공식적으로 제수하지는 않았다. 다만 선조 연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僧軍)을 조직하면서 임시방편으로 승직을 제수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산성의 수축과 관리를 승려들에게 맡기기 위해 계속해서 승직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승직은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처럼 양종 명칭과 함께 관습적으로 사용되었고 편법적으로 제수되었을 뿐 법적인 효력은 전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는 승군을 모집하게 하면서, 이들을 조직적으로 이끌기 위해 승장(僧將)을 선교도총섭에 임명하였다(『선조실록』 26년 8월 7일). 또 각 도에는 총섭을 임명하였는데(『선조실록』 29년 4월 17일), 이들에 대한 임명과 관리는 비변사(備邊司)에서 담당하였다. 또 승려에게 승직을 제수한 뒤 실록(實錄)을 지키게 하였으며(『선조실록』 27년 7월 20일), 도총섭 의엄(義嚴)과 유정(惟政)에게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을 지급하여 도총섭이 직접 선과(禪科)·승직·도첩(度牒)을 나누어 줌으로써 수월하게 승군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선조실록』 29년 12월 8일). 이처럼 전쟁이라는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제수한 도총섭과 총섭 등은 법제상의 공식 승직이 아니었고, 원래 도별로 임명되어야 하는 총섭이 아예 임명되지 않은 지역도 있는 등 체계적으로 운영되지도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총섭이나 총섭은 공식적인 권위를 얻을 수 없었고, 따라서 교단을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하였다.

그 뒤 18세기에는 지역별로 승려 감찰 기구인 규정소(糾正所)를 두어 승려들을 통솔하였다. 규정소가 설치된 사찰에는 승통(僧統)과 같은 승직을 두었다. 1790년(정조 14)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한 정조는 용주사 주지 사일(獅馹)을 팔도도승통 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하였는데, 오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인 용주사에는 전국의 승려를 규정하고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국가에서는, 승려의 충의를 기리며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향사하는 사원(祠院)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표충사(表忠祠) 같은 공인된 사원에는 종정(宗正)이나 원장(院長)을 향사 책임자로 임명하였는데, 그 아래에는 도총섭과 도승통 등의 승직을 두었다.

19세기에는 사찰에서 임의로 승직을 남발하면서 원래의 직책이 가지고 있던 권위가 상실되기 시작하였고, 교단 통솔 및 통합이라는 본연의 기능은 약화되고 사찰들 간의 세력 다툼을 불러일으켰다. 규모가 큰 사찰의 경우에는 주지의 상급 직책으로 승통을 두고 그 위에 다시 총섭을 두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승단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59년(철종 10)에는 승려들이 대둔사(大芚寺) 표충사(表忠祠)에 모여 승통제의 말폐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上·下
  •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박윤진, 『고려시대 국사·왕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98.
  • 허흥식, 『高麗佛敎史硏究』, 일조각, 1997.
  • 사문경, 「고려말·조선초 불교기관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손성필, 「16·17세기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동향」,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장동익, 「혜심의 대선사고신에 대한 검토」, 『한국사연구』34, 1981.
  • 정병삼, 「통일신라 금석문을 통해 본 승관제도」, 『국사관논총』62, 1995
  • 원영만, 「고려시대 승관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최재복, 「조선초기 왕실불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 鎌田茂雄, 『中國仏敎史』5, 東京大學出版會,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