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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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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악기조성청 |
한글표제 | 악기조성청 |
한자표제 | 樂器造成廳 |
동의어 | 악기감조색(樂器監造色), 악기도감(樂器都監) |
관련어 | 악기개수청(樂器改修廳) |
분야 | 문화/예술/음악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정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8년 1월 28일, 『순조실록』 3년 11월 4일, 『영조실록』 21년 2월 26일, 『영조실록』 21년 5월 15일, 『세종실록』 6년 11월 18일, 『세종실록』 12년 12월 27일, 『인조실록』 25년 1월 6일 |
궁중에서 악기 제작을 위해 설치했던 임시 기관.
개설
궁중의 악기 제작 수요가 발생할 때 설치되었던 임시 기구이다. 조선후기 숙종대부터 사용된 기관명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궁중의 다양한 행사에는 음악이 수반되었으므로, 음악을 연주할 여러 종류의 악기를 관리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악기 구비 문제는 궁중의 악기 보관 환경에 따라 제작, 교정, 수리 등의 과정을 거처 해결되었다. 낡아서 사용 불가능한 악기는 폐기하였고, 음률이 맞지 않는 것은 교정하여 썼으며, 일부 파손된 악기 중 수리 가능한 것은 보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또한 궁중의 화재나 전란 등의 사건에 의해 다수의 악기가 파손 혹은 분실되거나, 새로운 의례가 제정되어 전용 악기가 필요한 경우에는 악기를 제작하였다.
악기의 제작, 교정, 수리 작업이 시행될 때에는 그 일을 전담할 임시 기관을 두었다. 그 기관명은 악기도감(樂器都監), 악기감조색(樂器監造色),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 악기개수청(樂器改修廳) 등으로 드러난다. 이 중에서 악기조성청은 악기 제작에 관한 업무를 맡았던 기관이었다.
악기조성청은 숙종대 이후부터 궁중의 악기 제작 수요가 발생할 때마다 그 이름이 보인다. 숙종대에 종묘와 영녕전 제향에 사용할 방향을 제작할 때 악기조성청을 설치하였다(『숙종실록』 8년 1월 28일). 영조대에는 인정전(仁政殿)의 화재로 인해 소실된 악기를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정조대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에 제사 지낼 때 제례악을 연주할 전용 악기를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순조대에는 불타고 파손된 사직악기고(社稷樂器庫)의 악기 조성을 목적으로 악기조성청을 각각 설치하였다(『순조실록』 3년 11월 4일).
조직 및 역할
악기조성청은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의 본래 직책은 예조(禮曹) 판서(判書), 공조(工曹) 정랑(正郞), 공조 좌랑(佐郞), 호조(戶曹) 좌랑(佐郞), 장악원(掌樂院) 제조(提調), 장악원 주부(主簿) 등이었다. 한편 음률에 밝은 자를 특별히 차출하여 낭청을 역임하도록 임무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 영조대의 이휘진(李彙晉)과 이연덕(李延德)을 꼽을 수 있다(『영조실록』 21년 2월 26일). 이렇게 당상과 낭청으로 뽑힌 이들은 주로 악기 제작 관련 업무 전체를 총괄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 전악(典樂), 서리(書吏), 서사(書寫), 고직(庫直), 사령(使令) 등이 악기조성청에서 실무를 처리하였다.
섭외된 다수의 장인(匠人)들은 악기를 실제로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옥장(玉匠), 소로장(小爐匠), 석수(石手), 시장(匙匠), 두석장(豆錫匠), 은장(銀匠), 마경장(磨鏡匠), 마조장(磨造匠), 천혈장(穿穴匠), 조각장(雕刻匠), 소목장(小木匠), 야장(冶匠), 이지장(耳只匠), 목수(木手), 풍물장(風物匠), 조가장(造家匠), 다회장(多繪匠), 관자장(貫子匠), 안자장(鞍子匠), 고장(鼓匠), 장고장(杖鼓匠), 주장(注匠), 목혜장(木鞋匠), 통장(桶匠), 조현장(造絃匠), 태평소장(太平簫匠) 등 악기에서부터 악기틀과 장식 제작자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었다. 이들 가운데 소로장은 쇳물을 녹이는 일을 담당한 장인으로 편종(編鐘) 제작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옥장은 편경(編磬) 제작 과정에서 옥돌을 악기로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다듬는 일을 담당한 장인이었다.
악기 조성이 완료된 이후에는 악기조성청에 소속되었던 인물들에게 각각의 공로에 따라 포상하였다(『영조실록』 21년 5월 15일). 영조대 인정전 악기 조성 후 시상 내력은 이러하다. 악기조성청의 당상관 조관빈(趙觀彬)에게 잘 길들여진 말인 숙마(熟馬) 1필, 판서 조상경(趙尙絅)에게 반쯤 길들인 말인 반숙마(半熟馬) 1필, 판서이종성(李宗城)에게 아마(兒馬) 1필을 하사하였다. 또한 낭청 정랑김문행(金文行)과 박징좌(朴徵佐), 주부한명덕(韓命德)은 직급을 높여주었으며 정랑황익(黃榏), 좌랑박규수(朴奎壽), 주부송사흠(宋思欽)에게는 반달 모양의 활인 상현궁(上弦弓) 한 벌을 내려주었다. 부사과이연덕과 정이휘진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씩을 하사하였고, 감역김술로(金述魯)는 6품으로 직급을 올렸다. 감동관(監董官)최천약(崔天若)과 현덕룡(玄德龍)에게는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장인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쌀과 베[布]를 지급하였다.
이처럼 악기조성청에서는 악기 제작에 관한 업무를 체계적으로 운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재료 조달, 장인 동원, 기관 협조 요청 등 제반 사항을 조율함으로써 차질 없이 기한 내에 악기 조달을 가능하게 하였다. 더 상세한 내용은 『인정전악기조성청의궤(仁政殿樂器造成廳儀軌)』,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 『사직악기조성청의궤(社稷樂器造成廳儀軌)』 등 3종의 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변천
궁중의 악기 제작을 담당했던 기관명은 숙종대를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에 차이가 난다. 세종대에는 악기도감, 악기감조색이라 하였고(『세종실록』 6년 11월 18일), (『세종실록』 12년 12월 27일), 인조대에도 악기도감이라 칭하였다(『인조실록』 25년 1월 6일).
악기조성청이라는 명칭은 1682년(숙종 8)에 등장하여 영조대, 정조대 등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악기조성청은 조선전기에는 쓰이지 않았던 기관명이며 숙종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숙종대 이후에도 궁중의 악기 제작 수요가 발생할 때마다 악기조성청이라는 칭호로 임시 기관이 설치되어, 조선후기 궁중 악기 제작 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참고문헌
- 『제기악기도감의궤(祭器樂器都監儀軌)』
- 『인정전악기조성청의궤(仁政殿樂器造成廳儀軌)』
-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
- 『사직궁악기조성청의궤(社稷宮樂器造成廳儀軌)』)
- 송지원, 「규장각 소장 조선왕실의 악기제작 의궤 고찰」, 『國樂院論文集』 23집 , 국립국악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