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도감(樂器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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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악기 조성을 위해 설치한 임시 기구.

개설

조선시대 궁중 악기의 제작에는 많은 인력과 여러 기관의 협조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일정한 시기 동안 악기 제작을 추진하기 위한 임시 기구를 설치했다. 이를 조선전기에는 악기도감이라고 했고, 조선후기에는 주로 악기조성청이라고 불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예악(禮樂)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조선에서는 궁중의 의례에서 예와 악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음악과 악기는 나라 질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조선전기 자주적인 문화의 확립을 위해 노력한 세종대에는 아악과 아악기를 정비하고 신악(新樂)을 창제하였다.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등 중국에서 수입하던 악기들을 조선에서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개발하고, 옛 문헌에 의거하여 생황 등의 악기를 고증·제작·개수했다. 악기도감은 이러한 궁중의 악기 조성을 위한 임시 기구로 만들어졌다.

조직 및 역할

악기도감의 조직은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후기 『악기조성청의궤』의 악기조성청 조직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악기조성청은 관리자인 당상과 행정 실무자인 낭청, 역사를 감독하는 관원, 악사로서 잡직을 제수받고 악기 제작에 필요한 음악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전악, 문서를 담당하는 서리, 심부름을 맡은 사령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악기 제작 장인들과 바느질을 하는 기녀 등도 동원되었다.

악기도감은 일정한 행사를 앞두고 제례와 연향 등 궁중 의례에 필요한 악기 재료가 원활하게 수급될 수 있도록 각 관서의 협조를 구하였다. 악기를 고증하여 복원·제작할 뿐 아니라 해당 의례를 위한 복식과 각종 도구의 제작도 담당했다.

변천

악기도감은 아악기 등 악기 제작을 위한 연구와 작업이 활발했던 세종대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전란 이후 나라가 안정되자 인조는 산란한 제례악을 정비하기 위하여 악기도감을 설치하였지만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곧 폐지하였다. 그리고 1627년(인조 5) 악기수개청(樂器修改廳)을 설립하여 악기를 개수했다. 1646년에는 종묘제례악을 다시 시행하기에 앞서 악기도감을 설치하였다. 당시는 병자호란으로 음악인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국가 재정도 파탄 나서 종묘제례악이 정지된 상태였다. 다음 해인 1647년 악기도감에서는 제례 복식을 제작하여 올렸고 종묘제례악을 다시 설행하였다.

영조대에는 악기조성청을 두고 인정전 화재로 불탄 아악기를 제작했다. 정조대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짓고 악기조성청에서 경모궁 제례에서 사용할 악기와 복식, 의물을 모두 제작했다. 순조대의 악기조성청에서는 화재로 불탄 사직단의 아악기를 제작하였다.

참고문헌

  •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
  • 국립국악원 편,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신라 음성서에서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국립국악원, 2001.
  • 국립국악원 편, 『한국음악학학술총서 제7집: (역주)사직악기조성청의궤』, 국립국악원, 2008.
  • 국립국악원 편, 『한국음악학학술총서 제8집: (역주)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 국립국악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