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악(新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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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 조선 건국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아 만든 음악[樂]·노래[歌]·춤[舞].

개설

조선 건국 후 그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음악, 노래, 춤을 일컫는다. 태조대에 정도전이 태조의 위업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악장(樂章)을 지어 올리면서부터 신악(新樂)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세종대에는 많은 양의 작품이 만들어져 왕의 행차 음악으로 쓰이거나 다양한 궁중 행사에서 활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신악 제작은 조선 태조대부터 시작되었고 세종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신악 제작의 목적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신악의 가사는 주로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선왕들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제작된 신악의 노래가사, 악보, 춤 대열, 악기, 복식 등 관련된 내용이 『세종실록』「오례」 서례, 『세종실록』「악보」, 『세조실록』「악보」, 『악학궤범』 등에 전한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신악 중 왕의 행차와 연향 등에 연주되었던 여민락(與民樂)은 노래와 춤이 탈락된 채 기악곡의 형태로 현재에도 연주되고 있다. 또한 연향에서 공연된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은 1464년(세조 10) 이후 종묘 제사에서 사용되었으며,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절차 및 내용

태조대에 만들어진 신악으로는 「문덕(文德)」·「무공(武功)」·「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이 있다(『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정도전이 그 가사를 지었고, 음악과 춤을 덧붙여 공연하였다.

세종대에는 「정대업」·「보태평」·「발상(發祥)」·「봉래의(鳳來儀)」를 창작하였는데, 모두 음악·노래·춤을 갖춘 종합예술이었다. 「정대업」은 15곡, 「보태평」은 11곡, 「발상」은 11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대업」과 「보태평」은 세조대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면서 각각 11곡으로 정리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선율이 달라지고 춤도 변화되었다.

「봉래의」는 전인자(前引子)·진구호(進口號)·여민락·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豊亨)·후인자(後引子)·퇴구호(退口號) 이상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전인자는 기악곡이고, 진구호는 노래인데 「봉래의」의 시작을 알린다. 후인자와 퇴구호는 이와 대칭 관계를 이루면서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능을 하는데, 후인자는 기악곡이고 퇴구호는 노래이다. 진구호와 퇴구호의 가사는 4언 절구의 8구로 된 한시(漢詩)였다.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은 음악·노래·춤이 함께 공연되는 종합예술이었다. 이 세 곡은 「용비어천가」 일부를 가사로 사용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용비어천가」의 한문시는 여민락의 가사로 쓰였고, 국한문시는 치화평과 취풍형의 가사로 쓰였다. 예를 들어 여민락을 공연할 때에는 여기(女妓)들이 해동장(海東章)·근심장(根深章)·원원장(源遠章)·석주장(昔周章)·금아장(今我章)·적인장(狄人章)·야인장(野人章)·천세장(千世章)·자자장(子子章)·오호장(嗚呼章)을 노래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종대 신악은 왕의 행차, 궁중 연향(『세종실록』 29년 6월 4일) 등 여러 궁중 행사에서 활용되었으며 세종대 말엽에는 적극적인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1년 12월 11일). 그러나 세종대의 신악은 태조대에 만들어진 신악과 함께 오례서(五禮書)·악보(樂譜)·악서(樂書) 등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졌으며, 그중 여민락은 왕이 거둥할 때 자주 연주되었고, 치화평과 취풍형 등은 성종대 악공 시험곡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악학궤범(樂學軌範)』
  • 『정재무도홀기(呈才舞蹈笏記)』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송혜진, 『한국 아악사 연구』, 민속원, 2000.
  • 이혜구, 『한국음악서설』,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 장사훈, 『세종조 음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2.
  •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연구』, 일지사, 1977.
  • 이혜구, 「세종조 음악문화의 현대사적 재인식」, 『한국음악논집』, 한국음악사학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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