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혈장(穿穴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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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물에 구멍을 뚫는 일을 하는 장인.

개설

조선초기에 공조(工曹)와 선공감에 천혈장(穿穴匠)이 있어 궁궐을 영건하거나 기물을 제작할 때 동원되었다. 이들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17세기 초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경공장(京工匠)이 징발되었고,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는 공조·상의원(尙衣院)·내수사(內需司) 등 상설 아문에 소속된 관장(官匠)이거나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 등 군문에 소속된 천혈장이 동원되었다. 18세기 말부터는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이 1∼2명 동원되었다.

담당 직무

조선후기 도감에 소속된 천혈장은 도감의 성격에 따라 구멍을 뚫을 대상이나 재료가 달라졌다. 예컨대 1614년 화기도감에 징발된 천혈장은 1명은 하루에 쾌쟁(快錚) 13자루, 혹은 불랑기(佛狼機) 13대, 혹은 현자총통(玄字銃筒) 6대, 혹은 백자총통(百子銃筒) 7대, 승자총(勝字銃) 10자루, 혹은 삼안총(三眼銃) 10자루에 구멍을 뚫어야 했다. 국장·부묘·존호존숭도감 등에 차출된 천혈장은 시호나 존호를 새길 어보나 어책에 구멍을 뚫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수정하는 교정청에 동원된 천혈장은 서책에 구멍을 뚫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초기인 1434년(세종 16)에 공조와 선공감에는 천혈장 16명을 두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러나 성종대에 간행된 『경국대전』의 관공장 제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왕실의 오례의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권설도감 중 가례 관련 도감과 흉례 관련 도감에 천혈장이 동원되었다. 이를 통해 왕실 의례용품의 제작은 전문적이고 숙련된 장인에 의해 분업적으로 제작, 협업화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천혈장들은 시기에 따라 동원되는 인원수나 처지가 달라졌다.

17세기 초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경공장이 1~2명 징발되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내수사에 소속된 관장이나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 군문에 소속된 천혈장이 동원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천혈장이 장인 집안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도감에 동원된 천혈장은 모두 사장이었다. 18세기 말에 활약한 구룡주(具龍珠)의 경우 19년간 존호존숭도감에 주로 차출되어 어보와 어책에 전문적으로 구멍을 뚫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이왕무, 「광해군대 화기도감에 대한 연구」, 『민족문화』 제21집, 1998.
  • 장경희, 「조선후기 왕실의 옥공예 장인 연구」, 『미술사연구』 15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