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랑기(佛狼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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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이 왜군을 격퇴하면서 사용한 이후 조선에 도입된 유럽형 후장식(後裝式) 화포.

개설

불랑기(佛狼機)는 명나라 시대 포르투갈인이 16세기 유럽에서 발명한 후장식 화포를 소개하면서 비롯되었다. 명나라에서 포르투갈인을 지칭하던 프랑코(Franco)를 한자로 표기한 불랑기가 유럽식 화포를 호칭하는 말로 전이되었다.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국, 중국, 일본에 전파되었다. 당시 한·중·일의 화포는 대부분 전장식이던 것에 반해 유럽인이 전달한 화포는 후장식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불랑기였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불랑기를 이용하여 왜군을 격멸시키는 것을 확인한 뒤 이를 조선군의 대표적 화기로 정착시켰으며, 조선말기까지 이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불랑기는 후장식 화포로서 발사체를 사전에 준비해서 장전해 발사하였다. 따라서 발사체인 모포(母砲)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서 발사하는 자포(子砲)로 구성되었다. 자포가 모포와 분리되어 있어서 여러 개를 미리 준비해서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전장식 화포가 한 번 발사 이후 재차 발사를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했던 것에 비해 불랑기는 지속적인 발사가 가능했으며, 대형 화포가 아닌 소형 화포로서 선회(旋回)가 수월했다. 또한 성(城)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여 발사할 수 있었고 전선(戰船)에서도 위치를 수시로 바꿀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도 불랑기를 배치한 것이 확인된다(『선조실록』 28년 10월 27일).

변천

불랑기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군에 배치되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 포수의 시험에도 불랑기를 발사하는 과목이 있었다(『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광해군대에는 전일 무과 초시의 포수사목(砲手事目)에 불랑기가 조총 및 백자총(百字銃)과 같이 포함되었다(『광해군일기』 2년 10월 14일). 이후 조정에서는 화기 중에 불랑기가 가장 성능이 좋다고 평가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3월 3일). 숙종대에도 불랑기가 성곽을 방어하고 적을 공격하는 데 중요한 군기라고 인정하여 지속적으로 제작하게 하였다(『숙종실록』 34년 8월 5일).

현종대는 도성의 전면 방어선이었던 강화도의 방비에도 불랑기를 채택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3일). 당시 강화도 각 보(堡)에 배치된 불랑기는 244좌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2일). 불랑기는 개항 전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고종대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에도 총융청에서 강화도에 불랑기를 보내어 방어하도록 했다(『고종실록』 8년 4월 14일). 또한 동학군이 전주성에서 싸울 때에도 불랑기가 사용되었다(『고종실록』 31년 5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박재광, 『화염조선』, 글항아리, 2009.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13, 경인문화사, 2012.
  • 이왕무, 「광해군대 화기도감에 대한 연구」, 『민족문화』21,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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