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장(銀匠)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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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은장 |
한글표제 | 은장 |
한자표제 | 銀匠 |
관련어 | 관장(官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안귀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은장(銀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1월 19일 |
은공예품을 만드는 장인.
개설
은장(銀匠)들은 관장(官匠)과 사장(私匠), 승장(僧匠)으로 나누어진다. 관장은 조선말까지 중앙 관아에 예속되어 각종 의례나, 국신물(國信物), 하사(下賜), 왕실의 일상용 등의 용도에 따른 기명(器皿)들 및 장신구를 만들었다. 사장은 일반인들이 쓰는 은기나 비녀·가락지·노리개 같은 장신구들을 제작했고, 승장들은 사리구(舍利具)나 향합 등 불구(佛具)들을 만들었다. 은물(銀物)은 대체로 술이나 음식을 담는 기물과 신체를 장식하는 패물로 대별되는데, 17세기 후반 이후에 등장하는 대은장과 소은장도 이런 분류를 따라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장은 금·은기나 장신구 등을 구별 없이 만들었지만 관장들은 기물의 규모 및 용처에 따라 대공과 세공으로 나누었기에 장인들도 대은장과 소은장으로 구별해 불렀던 것 같다. 대은장은 병이나 주전자처럼 외형이 크고 둥근 기물은 배알레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력을 수반해야 하고, 소은장은 장신구가 규모는 작지만 섬세한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당연히 전문화되었을 것이다.
담당 직무
은장은 주로 왕실의 일상과 가례나 책례, 국장과 같은 각종 의례에 필요한 은기와 관수용(官需用)으로 쓰는 은기를 제작하였으며, 중국에 국신물로 보내는 은기나 공(功)이 있는 신하 및 궁인이 왕자를 생산했을 때 내리는 하사품을 만들었다. 은기의 사용은 관청이나 일반인들 모두 엄격히 제한하였는데, 1407년에 영의정성석린(成石璘)이 상서한 시무책(時務策) 20조에 의하면 금은기명은 궁내용과 공식적인 국가행사 시에 쓰는 국용 이외에는 일절 금지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7년 1월 19일). 조선시대 은장들이 만들었던 왕실 은기의 형태는 『세종실록』 「오례」 ‘가례서례’의 노부(鹵簿)에 그려져 있는 대은병, 은대병, 은태자 등의 견양(見樣)과 현존 유물로 알 수 있다. 의례 시에 대은장이 주로 제작한 기물을 보면 술잔 종류들이 많다. 은장들이 작업 시 사용하는 도구 및 소모품들은 주로 망치, 작은 베알레, 조각정을 비롯하여 모로대(毛老臺), 붕사, 감탕용 황밀(黃蜜), 들기름, 볏짚. 송진, 휴지, 굵은 철사, 연철(鉛鐵), 감탕판, 땔감, 수건용 베, 자물쇠를 갖춘 궤(樻), 파유둔(破油芚), 작은 화로, 털 있는 개가죽, 다리쇠[橋鐵], 소금, 팥비누, 매실, 녹반(碌磻), 염초(焰硝), 등자쇠[鐙子金], 소금물, 광내기용 세옥주(細玉珠), 대원반(大圓盤), 작은 놋그릇, 가는 철사, 산돼지 털, 집돼지 털, 목파조(木把槽), 공석(空石) 등이었다.
변천
조선초기의 『경국대전(經國大典)』「공조(工曹)」 ‘공장’조에 의하면 은장은 경공장(京工匠)으로 공조에 8명, 상의원에 8명을 두었을 뿐 외공장은 두지 않았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공조와 상의원에 각각 은장 8명을 두었는데, 은장의 수와 명칭은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조선후기 각종 의궤에 보이는 은장들은 대은장과 소은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장적(帳籍)을 만들어 소속 관청에서 보존했고, 나이 60이 되어야 신역이 면제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은장으로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장 김신룡(金信龍)은 『제기악기도감의궤(祭器樂器都監儀軌)』, 『효종국장도감도청의궤(孝宗國葬都監都廳儀軌)』에 기록되어 있어 청년 때부터 60세 정도까지 궁중 행사에 동원되었던 명장(名匠)이었던 같다.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걸출한 은장으로는 상의원의 소은장 이만재(李萬載)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肅宗御容圖寫都監儀軌)』부터 『효종가상시호도감의궤(孝宗加上諡號都監儀軌)』까지 5개의 의궤에 보이므로 20여 년간 활동한 당대 최고의 은장이었다. 또한 18세기 중반에 활동한 박지발(朴枝發)이나 18세기 후반의 상의원 소속 서인환(徐仁煥)도 소은장으로 오랜 기간 활동했던 명장이었다. 19세기에는 대은장으로 신희철(申喜徵), 이인택(李仁澤), 이인철(李仁喆), 이문택(李文澤), 신희윤(申喜潤), 이춘길(李春吉), 최석록(崔錫祿) 등이 활동했다. 특히 이문택은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부터 『함풍원년가례도감의궤(咸豊元年嘉禮都監儀)』까지 3개의 의궤에 대은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20여 년 이상 대공(大工) 분야의 명장이었던 셈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고려도경(高麗圖經)』
- 김종태, 『韓國手工藝美術』, 예경산업사, 1990.
- 삼성문화재단, 『大高麗國寶展』, 삼성문화재단, 1995.
- 예용해, 『人間文化財』, 어문각, 196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