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장(玉匠)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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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옥장 |
한글표제 | 옥장 |
한자표제 | 玉匠 |
상위어 | 경공장(京工匠), 공장(工匠), 관장(官匠), 사장(私匠), 외공장(外工匠), 장공인(匠工人), 장인(匠人) |
동의어 | 경옥장(京玉匠), 옥공(玉工), 옥인(玉人), 향옥장(鄕玉匠) |
관련어 | 관옥장(冠玉匠), 섭장, 화장(咊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장경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옥장(玉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1년 7월 22일, 『연산군일기』 9년 12월 10일, 『연산군일기』 10년 7월 13일, 『연산군일기』 11년 5월 18일, 『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9월 18일, 『연산군일기』 9년 12월 13일, 『연산군일기』 10년 7월 13일, 『중종실록』 23년 1월 27일 |
관부에서 옥을 가공하여 각종 공예품을 만들던 장인.
개설
사전적으로 이와 비슷한 개념을 가진 섭장 또는 화장(咊匠)이 있다. 섭은 조선의 속자로 높고 깊게 새긴다는 것을 의미하며, 섭장은 가장 좋은 옥인 양지옥(羊脂玉)을 다루어 높고 깊게 새기는 ‘옥섭주지장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섭장은 옥보다 금속제 표면을 높고 깊게 새기는 조각장(彫刻匠)·조이장(彫伊匠)으로 개념이 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초기에 옥장은 상의원에 소속되어 옥의 산지에 가서 옥을 캐서 왕실의 상징물과 생활용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이들 옥장의 존재는 왕실 의례 행사 때마다 임시로 설치 운영한 도감에 차출되어 활동하였으며, 행사 전말을 기록한 『의궤(儀軌)』를 통해 그들의 처지나 직역(職役)의 변화를 시기에 따라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옥장은 서울의 경공장(京工匠)보다는 옥의 산출지에서 향공장(鄕工場)을 동원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의 옥장은 상의원(尙衣院)이나 내수사(內需司) 등지의 상설 아문에 속한 관장(官匠)이나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 등 군문(軍門)에 소속되어 차출되었다. 18세기 말부터 관장제가 해체되면서 옥장 또한 사적(私的)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으로 전환되면서 국가적인 수요가 있을 때마다 동원되었다.
담당 직무
조선전기의 옥장들은 과천, 수원 등지에서 백옥을, 경주에서 마노를 채취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490년(성종 21)과 1503년(연산군 9)에 과천에 사는 옥장 김효련(金孝連)이 관악산에서 백옥 네 덩이를 캤다(『성종실록』 21년 7월 22일), (『연산군일기』 9년 12월 10일). 경주에서는 마노를 캤으며(『연산군일기』 10년 7월 13일), 수원에서는 백옥을 채취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5월 18일). 양양에서는 수정을 캐러 내려가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9월 18일). 조선후기 『의궤』에 의하면 옥책이나 옥동자 및 기명을 제작할 때 옥석의 생산지로는 20개 읍이 지목되었다.
이렇게 수집된 옥석은 종별이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특산지의 옥을 사용하였고, 왕권을 상징하는 의물(儀物)이나 일상용 공예품을 제작하는 일도 옥장의 직무였다.
첫째, 왕권을 상징하는 의물에는 옥보(玉寶)와 옥인(玉印) 및 옥책(玉冊) 등이 있다. 둘째, 왕실 의례 때 옥장은 왕·왕비·왕세자·왕세자빈 등이 착용한 예복(禮服)에 패용할 장신구를 제작하였다.
셋째, 왕실의 가례 행사 때 옥장들은 옥병이나 옥잔 등의 그릇을 제작하였다. 연산군 때 백옥으로 술잔 받침을 만들었다(『연산군일기』 9년 12월 13일). 조선후기 국혼이나 진연·진찬 등 왕실의 행사 때 사용하는 그릇의 재료는 왕실의 위차에 따라 달랐다.
넷째, 옥장은 왕·왕비의 일상생활에 착용하는 장신구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왕은 일상생활에서 편복(便服) 또는 상복(常服)으로 용포를 입고 익선관을 썼다. 이때 머리를 간추리고자 망건의 관자노리를 옥으로 장식한 옥관자(玉貫子), 용포 위에는 허리띠로서 띠는 옥대(玉帶)를 제작하거나(『연산군일기』 10년 7월 13일), 옥대구를 만들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3년 1월 27일).
변천
옥은 일찍부터 왕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재료로 귀하게 여겨졌다. 중국에서는 상(商)·주(周) 때부터 국가의 상징물로 옥새(玉璽)를 제작하거나 각종 의례 용품이나 장신구를 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옥을 주술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다가 점차 장신구로 발전하였다.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는 대롱옥[管玉] 형태의 목걸이나 256개의 환옥(還玉)이 출토되었다. 신라의 금령총이나 금관총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지배층의 목걸이나 관 장식 등에 옥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품목이었다. 이 시기의 옥은 마치 태아처럼 구부러진 형태를 지닌 곡옥(曲玉)이 특징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옥은 각종 장식품이나 반지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중국에서 고려에 어보(御寶)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상의원에 옥장 10명을 두어 옥으로 옥보나 옥책 등 왕실 의례용이나 국가 상징물을 제작하였고, 어복용 장신구를 비롯한 사치 용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개설된 가례도감이나 존호존숭도감에 동원된 옥장들의 사회적 처지는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옥장은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 등록되어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도감에 동원된 옥장은 경(京)과 거주 읍명을 구체적으로 병기하고 있어 경옥장과 향옥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1610년부터 1690년까지 19차례의 도감에 동원된 옥장의 전체 인원은 144명이었는데, 향옥장이 126명으로 전체의 87%에 해당되었다. 경옥장 1∼2명에 향옥장은 5∼10배에 해당되는 2∼50명을 동원하고 있었다. 1680년대 후반부터 경옥장은 내수사와 상의원과 같은 관청의 관장이 되었고, 향옥장은 경공장이 되었다가 관장이 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옥장의 기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국가에서는 199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을 지정하였고, 보유자로 장주원이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문화재청, 『조선왕실의 어보』 제1권, 국립고궁박물관, 2010.
- 장경희, 『고궁의 보물』, 예맥, 2007.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중요무형문화재 100호 옥장』,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 장경희, 「조선 후기 왕실의 옥굥예 장인 연구」, 『미술사연구』 15호 , 미술사연구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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