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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4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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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노경임 |
한글표제 | 노경임 |
한자표제 | 盧景任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홍중(弘仲) |
호 | 경암(敬菴)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9년(선조2) |
사망 | 1620년(광해군12) |
본관 | 안강(安康) |
주거지 | 경상도 선산(善山)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선산(善山) 영귀정(詠歸亭) |
증조부 | 노관(盧綰) |
조부 | 노희식(盧希軾) |
부 | 노수함(盧守諴) |
모_외조 | 인동장씨(仁同張氏): 장렬(張烈)의 딸 · 장현광(張顯光)의 누이 |
처_장인 | 풍산유씨(豊山柳氏): 유운룡(柳雲龍)의 딸 →(자녀)2남 4녀 |
자녀 | (1자)노세겸(盧世謙) (2자)노세양(盧世讓) (1녀)김윤(金鋆)의 처 (2녀)김휴(金烋)의 처 (3녀)김광수(金光遂)의 처 (4녀)강선(康笸)의 처 |
저술문집 | 『경암집(敬菴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노경임(盧景任) |
총론
[1569년(선조2)∼1620년(광해군12) = 52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菴)이다. 본관은 안강(安康)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선산(善山)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진사(進士)노수함(盧守諴)이고, 어머니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장렬(張烈)의 딸이다. 동래(東萊) 교수(敎授)노희식(盧希軾)의 손자이며,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의 조카이고,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외삼촌 장현광에게 글을 배우다가, 유성룡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선조24)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 교서관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문원 정자(正字)로 옮겼는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향 선산(善山)으로 돌아와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김성일(金誠一)이 경상좌도 관찰사에서 경상우도 관찰사가 되자, 그는 김성일의 지시를 받고 경상우도 의병장들을 모았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2) 의병들과 관군은 연합하여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였다. 1594년(선조27) 예조 좌랑으로 승진하고,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강원도순안어사(江原道巡按御史)로 나가 왜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친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인 삼척부사홍인걸(洪仁傑)의 비행을 행재소의 선조에게 알렸다. 1596년(선조29)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에 들어가서 수찬(修撰) ·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는데, 도체찰사(都體察使)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전쟁 중에 삼남지방(三南地方)을 순찰하면서 임기응변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였다. 이듬해 도체찰사이원익의 지시를 받고 전쟁 상황을 보고하기 위하여 영남 지방에서 상경하니, 선조가 불러서 접견하였다. 1598년(선조31)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외직으로 나가 예천(醴泉) · 풍기(豊基) · 영해(寧海) · 성주(星州)의 수령(守令)을 지냈다.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의정이 되었다. 노경임은 왜란 중에 외삼촌 장현광의 심부름으로 정인홍을 만나본 후 그에 대하여 악평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정인홍에게 알려져서, 정인홍은 그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광해군 초년에 노경임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성주목사에서 파직되었는데, 그는 정인홍이 대간을 사주하여 그를 벼슬에서 쫓아낸 것이라 생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617년(광해군9) 비변사에서 유장(儒將)으로 노경임 등을 천거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20년(광해군12) 병을 얻어 10월에 선산(善山) 고을 남쪽 모로촌(慕魯村)의 농막(農幕)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52세였다.
저서로『경암집(敬菴集)』7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풍채는 장엄하고 청수(淸秀)하며, 성품은 중후하고 언행은 정중하였다. 집 밖에서는 남에게 과격하게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집 안에서는 한결같이 예절 바르게 행동하였다.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 마치 부모의 상처럼 그 상례를 다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였으므로, 아버지 송암(松庵)노수함은 그가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라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장현광과 유성룡의 문하에서 훈도를 받으며 도학(道學)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입(沒入)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천성적으로 효심(孝心)이 돈독하여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항상 가슴 아프게 여겼고, 어머니를 섬기는 데에 효성을 다하였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 정성에서, 말하다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하거나, 가끔 목이 메일 때도 있었다. 강원도순안어사로 그 지역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시폐(時弊)를 상소하였는데, 그 끝에다가 “인주(人主)의 한결같은 마음이 정치의 요체이므로, 인주는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하고 간(諫)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노경임이 의병으로 활동할 때 외삼촌 장현광이 “정인홍은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제자로 명성이 높다.”고 충고하고, 한번 찾아가서 만나보게 하였다. 당시 정인홍도 경상도 성주 · 합천 등지에서 의병 3천 명을 모아서 곽재우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고 있었다. 노경임이 정인홍을 찾아가서 만나보고 돌아왔는데, 그의 심술(心術)이 바르지 않다고 비난하였다. 아마도 의병의 당면 문제와 성리학의 이론을 토론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성룡 · 김성일에게 이황의 퇴계학(退溪學)을 전수 받았던 노경임은, 조식의 남명학(南冥學)에서 제1인자를 자부하던 정인홍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해군 초년에 그가 성주목사에서 파직되었을 때, 그는 영의정정인홍이 대간을 사주하여 그를 무함(誣陷)하여 탄핵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노경임은 낙동강 상류에다 집을 짓고는 집안에 들어앉아 세상일에 관계없이 노닐면서 여생을 보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경상도 선산(善山) 도리산(桃李山)에 있었는데, 30년 뒤에 부인이 죽어서 영귀정(詠歸亭) 동쪽 봉성산(鳳城山) 기슭에 이장하고 부부를 합장(合葬)하였다.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1650년(효종1)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책봉되고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다. 부인 풍산유씨(豊山柳氏)는 원주목사(原州牧使)겸암(謙庵)유운룡(柳雲龍)의 딸로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노세겸(盧世謙)이고, 차자는 노세양(盧世讓)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경암집(敬菴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여헌집(旅軒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택당집(澤堂集)』
- 『서애집(西厓集)』
- 『한강집(寒岡集)』
- 『오리집(梧里集)』
- 『태천집(苔泉集)』
- 『겸암집(謙庵集)』
- 『인재집(訒齋集)』
- 『연천집(淵泉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