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걸(洪仁傑)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41년(중종36)∼1603년(선조36) = 63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응시(應時)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직장홍덕렴(洪德濂)이고,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이세성(李世成)의 딸이다. 성균관 사성홍이평(洪以平)의 손자이고, 중추부 첨지사홍덕연(洪德演)의 조카이다.

선조 시대 활동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자력으로 공부한 끝에 1568년(선조1) 28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1573년(선조6) 33세로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과 정랑을 거쳐,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부임하여서는 충청도병마사(忠淸道兵馬使)와 힘을 합쳐 해미읍성(海美邑城)을 튼튼하게 증축하였다. 이어 군기시 부정에 임명되었다가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는데, 월과(月課)에 뽑혀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승진하자, 서천 사람들이 길을 막고 유임하기를 청원하였다. 그가 회양 고을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자, 관찰사가 포상하도록 계문(啓聞)하였으므로,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그가 회양을 떠난 뒤에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이이(李珥)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그를 헌부의 관원으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동인(東人) 낭관(郎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1583년(선조16)에 홍인걸은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계갑일록(癸甲日錄)』) 이후에는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갈 때 그는 오위장으로서 호종(扈從)하였다. 고양(高陽)에서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서행(西行) 도중에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자 동생 홍인간(洪仁侃)을 데리고 적진을 뚫고 삼척으로 갔다.

임진왜란 때 삼척 포로 살해 사건

1592년(선조25) 8월 삼척부사에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하루는 왜선(倭船)들이 이르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동생 홍인간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왜적과 싸워 그들을 물리치고, 모두 붙잡아 왔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부사홍인걸은 관찰사에게 보고한 다음, 포로들을 옥에 가두고 압송 명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홍인간이 우리 군사들과 술을 마시다가 격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놈들을 도와서 변방의 우리 백성들을 해친 악행은, 왜놈들의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모두 동족을 해친 포로들을 그대로 살려둘 수 없다고 흥분하여, 옥으로 몰려가서 감옥에 갇힌 우리나라 포로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홍인간이 그 사건을 보고하지 않고 비밀로 하였으므로 삼척부사홍인걸은 이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당시 강원도 순안 어사(巡按御史)노경임(盧景任)이 이 사건을 듣고 “홍인걸이 무고한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여 전공을 세우려 합니다.”라고 조정에 아뢰었으므로, 홍인걸은 즉시 체포되었다. 홍인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강원도관찰사는 삼척의 아전과 백성들을 잡아다가 참혹하게 심문하였다. 홍인걸의 생명이 위험해지자, 서인(西人)의 윤근수(尹根壽) 등이 적극 구원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의 반대로 풀려나지 못하고 9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운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홍인걸의 사위가 송강(松江)정철(鄭澈)의 아들이었으므로, 동인들이 정철을 미워한 나머지, 그의 사돈인 홍인걸을 감옥에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였다.(『청음집(淸陰集)』권6)

성품과 일화

홍인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모습이 헌칠하고 성품이 너그럽고 소탈하였다. 평소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나, 부인 박씨가 날마다 주식(酒食)을 마련해서 손님을 대접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생활 형편에 대해서 물으면 그는 그저 웃으면서, “나는 날마다 이처럼 한 병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족합니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과 왕래를 잘 하지 않았다. 퇴청하면 항상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서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 등을 즐겨 읽었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자력으로 학문을 하여 나이 28세 때에 진사가 되고, 나이 33세 때 대과에 급제하였다. 정철과 사돈관계였기 때문에 당파 싸움에 따라 벼슬의 부침(浮沈)이 심하였다. 그의 외동딸이 정철의 아들 정종명(鄭宗溟)에게 출가하여 5남 2녀를 낳았는데, 그는 외손자들을 사랑하여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그가 감옥에서 죽을 때 유명을 남기기를, “둘째 정수(鄭洙)가 내 제사를 지낼 터이니, 내 재산을 모두 주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서자 홍탁(洪逴)과 홍정(洪頲) 형제와 둘째 외손자 정수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모두 순사(殉死)하였다. 그리하여 넷째 외손자 사헌부 장령정양(鄭瀁)이 그의 제사를 받들었다.

묘소와 비문

홍인걸 내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는데, 나중에 경상도 봉화(奉化) 신산(辛山)으로 옮겼다. 외손자 정양의 부탁으로,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유병(朴維屛)의 딸이다. 외동딸은 강릉부사(江陵府使)정종명의 아내가 되었다. 측실에서 난 아들은 홍탁과 홍정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갑일록(癸甲日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경암집(敬菴集)』
  • 『무주일고(無住逸稿)』
  • 『밀암집(密菴集)』
  • 『송강집(松江集)』
  •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 『태천집(苔泉集)』
  • 『하음집(河陰集)』
  • 『학사집(鶴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