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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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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수군 활동'''==
 
=='''임진왜란 때 수군 활동'''==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선(倭船)]]이 남쪽 바다를 석권하자, 송여종(宋汝悰)은 스스로 낙안군수(樂安郡守)[[신호(申浩)]]의 막하(幕下)에 들어갔다. 낙안군수신호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이순신(李舜臣)의 부서(部署)에 예속되었는데, 그해 5월 한산도(閑山島)와 옥포(玉浦)에서 왜적과 싸울 적에 그는 하루도 군중(軍中)의 배를 떠난 적이 없었다. 우리 [[수군(水軍)]]이 크게 승리하자, 이순신이 송여종에게 승전(勝戰) 소식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피난길에 있는 임금을 찾아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는 적의 진영을 헤매면서 낮에는 매복하였다가 밤중에만 움직여서 구사일생으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승전을 보고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승전 소식이었으므로, 선조가 기뻐하여 그를 인견(引見)하고 변경의 일을 친히 묻고, 술을 내려서 위로하면서 전교하기를, “전라좌수사의 군관송여종은 험난한 길을 어렵사리 왔으니, 남방(南方)의 [[수령(守令)]] 중에서 궐석이 있는 곳에 임명하도록 하라.” 하여, 이조에서 즉시 전라도 남평현령(南平縣令)에 임명하였다. 마침 전라도 장흥(長興) 녹도(鹿島)의 전 [[만호(萬戶)]]정운(鄭運)이 부산포 해전에서 왜적의 탄환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병조에서 송여종이 이순신의 관하(管下)에 있어서 수전(水戰)에 익숙하다고 추천하여, 즉시 남평현령에서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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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선(倭船)]]이 남쪽 바다를 석권하자, 송여종(宋汝悰)은 스스로 낙안군수(樂安郡守)[[신호(申浩)]]의 막하(幕下)에 들어갔다. 낙안군수신호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이순신(李舜臣)의 부서(部署)에 예속되었는데, 그해 5월 한산도(閑山島)와 옥포(玉浦)에서 왜적과 싸울 적에 그는 하루도 군중(軍中)의 배를 떠난 적이 없었다. 우리 [[수군(水軍)]]이 크게 승리하자, 이순신이 송여종에게 승전(勝戰) 소식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피난길에 있는 임금을 찾아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는 적의 진영을 헤매면서 낮에는 매복하였다가 밤중에만 움직여서 구사일생으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승전을 보고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승전 소식이었으므로, 선조가 기뻐하여 그를 인견(引見)하고 변경의 일을 친히 묻고, 술을 내려서 위로하면서 전교하기를, “전라좌수사의 군관송여종은 험난한 길을 어렵사리 왔으니, 남방(南方)의 [[수령(守令)]] 중에서 궐석이 있는 곳에 임명하도록 하라.” 하여, 이조에서 즉시 전라도 남평현령(南平縣令)에 임명하였다. 마침 전라도 장흥(長興) 녹도(鹿島)의 전 [[만호(萬戶)]]정운(鄭運)이 부산포 해전에서 왜적의 탄환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병조에서 송여종이 이순신의 관하(管下)에 있어서 수전(水戰)에 익숙하다고 추천하여, 즉시 남평현령에서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27) 4월 조정에서 수군에 익숙한 인재를 뽑기 위하여 특별히 [[무과(武科)]]를 베풀었는데, 송여종이 을과(乙科)에 합격하니, 그때 나이가 42세였다. 송여종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서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번번이 실패했었다. 임진왜란 때 그는 녹도만호로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된 이순신의 휘하에서 명나라 수군과 함께 죽도(竹島)에 진을 치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다.
 
1594년(선조27) 4월 조정에서 수군에 익숙한 인재를 뽑기 위하여 특별히 [[무과(武科)]]를 베풀었는데, 송여종이 을과(乙科)에 합격하니, 그때 나이가 42세였다. 송여종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서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번번이 실패했었다. 임진왜란 때 그는 녹도만호로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된 이순신의 휘하에서 명나라 수군과 함께 죽도(竹島)에 진을 치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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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태인 상두산(象頭山)의 묘원(墓原)에 있는데, 수은(睡隱)[[강항(姜沆)]]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김씨(金氏)는 학생 김우순(金友順)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진경(宋震慶)은 검모포만호(黔毛浦萬戶)를 지냈고, 3남 송진선(宋震善)은 여도만호(呂島萬戶)를 지냈다. 장남 송진경이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아버지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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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전라도 태인 상두산(象頭山)의 묘원(墓原)에 있는데, 수은(睡隱)[[강항(姜沆)]]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김씨(金氏)는 학생 김우순(金友順)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진경(宋震慶)은 검모포만호(黔毛浦萬戶)를 지냈고, 3남 송진선(宋震善)은 여도만호(呂島萬戶)를 지냈다. 장남 송진경이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아버지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관력,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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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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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수은집(睡隱集)』         
 
*『수은집(睡隱集)』         

2018년 1월 9일 (화) 22:46 기준 최신판




총론

[1553년(명종8)∼1609년(광해군1) = 57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자는 언온(彦蘊)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태인(泰仁)이다. 이조 판서송세형(宋世珩)의 손자이고,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송창(宋昌)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수군 활동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선(倭船)이 남쪽 바다를 석권하자, 송여종(宋汝悰)은 스스로 낙안군수(樂安郡守)신호(申浩)의 막하(幕下)에 들어갔다. 낙안군수신호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이순신(李舜臣)의 부서(部署)에 예속되었는데, 그해 5월 한산도(閑山島)와 옥포(玉浦)에서 왜적과 싸울 적에 그는 하루도 군중(軍中)의 배를 떠난 적이 없었다. 우리 수군(水軍)이 크게 승리하자, 이순신이 송여종에게 승전(勝戰) 소식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피난길에 있는 임금을 찾아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는 적의 진영을 헤매면서 낮에는 매복하였다가 밤중에만 움직여서 구사일생으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승전을 보고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승전 소식이었으므로, 선조가 기뻐하여 그를 인견(引見)하고 변경의 일을 친히 묻고, 술을 내려서 위로하면서 전교하기를, “전라좌수사의 군관송여종은 험난한 길을 어렵사리 왔으니, 남방(南方)의 수령(守令) 중에서 궐석이 있는 곳에 임명하도록 하라.” 하여, 이조에서 즉시 전라도 남평현령(南平縣令)에 임명하였다. 마침 전라도 장흥(長興) 녹도(鹿島)의 전 만호(萬戶)정운(鄭運)이 부산포 해전에서 왜적의 탄환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병조에서 송여종이 이순신의 관하(管下)에 있어서 수전(水戰)에 익숙하다고 추천하여, 즉시 남평현령에서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27) 4월 조정에서 수군에 익숙한 인재를 뽑기 위하여 특별히 무과(武科)를 베풀었는데, 송여종이 을과(乙科)에 합격하니, 그때 나이가 42세였다. 송여종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서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번번이 실패했었다. 임진왜란 때 그는 녹도만호로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된 이순신의 휘하에서 명나라 수군과 함께 죽도(竹島)에 진을 치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수군 활동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삼도수군통제사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원균이 통제사를 대신하자, 그 휘하에서 왜적과 싸웠다. 그해 7월 통제사원균이 적의 계략에 빠져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멸하였으나, 송여종은 휘하의 함선을 잘 지휘하여 모두 완전하였으므로, 사람들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되자, 그는 이순신을 도와서 패전한 수군의 재건에 나섰는데, 타다가 남은 배들을 수선하고 보완하기도 전에 적선(敵船) 2백여 척이 벽파(碧波) 앞 바다에 들이닥쳤다. 우리 함선은 고작 10척이었으나, 송여종 등은 이순신의 지휘대로 왜적과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1597년(선조30) 8월 통제사이순신은 왜적과 싸우면서 본영(本營)을 목포 보화도(寶花島)로 옮겼다가, 1598년(선조31) 2월 다시 본영을 고금도(古今島)로 옮겨서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해 4월 녹도만호송여종이 함선을 이끌고 명나라 배와 함께 출전하여 적선 6척과 왜적의 머리 70급을 포획하였다. 이어 7월에는 이순신이 송여종에게 명하여 녹도의 수로(水路)를 지키게 하자, 송여종이 즉시 함선 6척을 거느리고 가서 수로를 지키다가 적선 10척을 역습하여 적을 남김없이 섬멸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통제사이순신과 수군제독진린(陳璘)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서 퇴각하는 일본 적선 5백여 척을 노량(露梁)에서 총공격을 하였다. 이때, 그도 함선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여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러서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이것이 <노량대첩(露梁大捷)>인데, 송여종의 전공이 제장(諸將) 중에서 제일 으뜸이었으나, 그가 모시던 이순신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왜란 이후의 활동

1599년(선조32) 왜란이 끝나자,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왜란 때의 전공으로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서울에 올라가서 사은(謝恩)하자, 사복시(司僕寺)정(正)에 임명되었다. 1601년(선조34) 임류진첨사(臨溜鎭僉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흥양현감(興陽縣監)에 전임되었다. 1605년(선조38) 왜란의 전공을 포상할 때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하사받았고, 얼마 후에 곤양군수(昆陽郡守)에 임명되었는데, 백성들이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 원망하였으므로 파직되었다. 1607년(선조40) 경상우도 수군우후(慶尙右道水軍虞候)에 임명되었는데, 임지(任地)에 있을 때에 부친상을 당하여 태인의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애통해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러다가 1609년(광해군원년) 8월 상중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7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여종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9척 장신이었으나, 타고난 품성은 온화하고 순수하였다. 보통 때에는 시종 한결같이 남에게 겸손하고 공순하였으나, 군진(軍陣)에서 적(敵)과 대적할 때에는 우뚝하게 서서 호령하고 남에게 절대 굽히지 않았다. 8년 동안 바다에서 왜적과 크고 작은 6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는데, 시석(矢石)이 좌우로 날아와도 조금도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1597년(선조30) 8월 통제사이순신이 본영을 목포 보화도로 옮겨서 진지를 구축할 때, 흥양(興陽)의 왜적이 이 틈을 타서 사방에서 사람들을 살육하고 재물을 약탈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순신은 송여종을 불러서 복병장(伏兵將)으로 임명하고 정예한 병사 1백 명을 주어서 흥양으로 급히 파견하였다. 송여종은 훈련된 특수 결사대들을 이끌고 모두 함매(銜枚: 입마개를 함)한 채 몰래 적진으로 들어가서 적의 본진을 기습하여, 적병을 수없이 무찔러 죽이고, 포로로 잡혀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모두 구출하였다. 이리하여 흥양의 왜적들이 혼비백산하여 순천(順天)으로 철수하였다.

1598년(선조31) 2월 이순신이 본영을 다시 고금도로 옮겨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적선이 갑자기 대거 공격하여 왔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이 홍기(紅旗)를 세우고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본영에 정박 중인 우리 전선(戰船)들을 에워싸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왜적의 대장이 직접 전선을 지휘하여 이순신의 본진을 기습 공격하였는데, 자칫하면 이순신의 본진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그 목숨까지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처럼 절박한 때에 녹도만호송여종과 영등만호(永登萬戶)정응두(丁應斗)가 각기 함선을 이끌고 잇따라 나타나서 왜적의 함선을 포위하고 힘껏 싸웠다. 그리하여 단숨에 적선 11척을 격파하니, 왜적은 그 기세가 크게 꺾여서 도망쳤다. 그해 7월 이순신이 송여종에게 명하여 녹도의 수로를 지키게 하자 그는 즉시 함선 6척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녹도 앞 바다에 가서 은밀히 정박하였다. 마침 바다 안개가 많이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적선 10척이 바다 안개 속에 몰래 도착하여 장차 밤을 틈타 급습하려고 하였다. 이때 송여종이 즉시 돛대를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역습하여 적을 남김없이 섬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송여종의 전공을 크게 칭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전공을 기록한 장계(狀啓)를 조정에 올려 보내어 포상하게 하였다. 이때 명나라 수군제독진린도 그에게 은화(銀貨)와 포목(布木)을 후하게 보내어 상으로 주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태인 상두산(象頭山)의 묘원(墓原)에 있는데, 수은(睡隱)강항(姜沆)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김씨(金氏)는 학생 김우순(金友順)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진경(宋震慶)은 검모포만호(黔毛浦萬戶)를 지냈고, 3남 송진선(宋震善)은 여도만호(呂島萬戶)를 지냈다. 장남 송진경이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아버지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수은집(睡隱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잠곡유고(潛谷遺稿)』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