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申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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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9년(중종 34)∼1597년(선조 30) = 59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지냈고, 증직(贈職)은 형조 판서이다. 자는 언원(彦源)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평산(平山)이다. 아버지는 신희중(申希仲)이고, 어머니 창녕 장씨(昌寧張氏)는 사인(士人)장희령(張希齡)의 딸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성(南原城) 혈전>에서 순사(殉死)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명종 22)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에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 두 차례 변방의 장수를 맡고 세 차례 고을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일찍이 호적(胡賊)이 호산포(浩山浦)를 노략질하자, 병조에서 신호를 보내어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게 하였다.[『식암유고(息庵遺稿)』 권 22 「낙안 군수 증 형조 판서 신공 시장(樂安郡守贈刑曹判書申公諡狀)」] 신호가 오랫동안 변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선조가 하교하기를, “신호가 여러 해를 북방을 지켜서 공훈(功勳)과 수노가 많으니, 내직(內職)으로 제수하여 그 공로를 표창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신호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사(都事)에 특별히 임명되었다가, 경력(經歷)으로 승진되었다.[『식암유고』 권 22 「낙안 군수 증 형조 판서 신공 시장」]

1592년(선조 25) 2월에 낙안 군수(樂安郡守)가 되었는데,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구가 쳐들어오자, 좌수사(左水使)이순신(李舜臣)이 그를 주사 중위장(舟師中衛將)으로 삼아서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왜적과 맞붙어 싸우게 하였다. 당시 진영에 제장(諸將)이 많았으나 그가 조치한 바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고, 또 낙안의 배가 가장 잘 정돈되고 빨랐기 때문에 항상 선두에서 적의 선봉을 맞이하였다. 그가 일찍이 왜구를 공격하여 큰 배 2척을 빼앗고, 적의 머리 수십 급(級)을 또 참획(斬獲)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여 그 공을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겸(兼) 내자시(內資寺)정(正)을 겸임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16일)

신호는 관직을 맡아 정사를 할 적에 권력 있는 집안을 억제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전적으로 힘썼다. 이 때문에 군대에서 권력 있는 집안 출신 가운데 그를 원망하는 자가 많았는데, 1594년(선조 27) 어사(御使)가 그들의 하소연을 받아들여 신호를 군대에서 축출하여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統制使)가 되어서, 신호의 재주와 용맹을 중하게 여겨서,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다시 신호를 주사 조방장으로 삼았다.[『서계집』 권16]

1597년(선조 30) 신호는 남원부(南原府)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어장(守禦將)으로 옮겨서 임명되었다. 그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도원수권율(權慄)이 대구에 머물면서 각 도의 군사 2만 3천여 명을 모아서 왜적이 오는 길목에 장수를 정하고 군사를 나누어 막게 하였다. 남원 부사최렴(崔濂)이 산성 별장(山城別將)신호와 함께 일곱 고을의 군사를 모아서 교룡산성을 수축하였다.[『연려실기술』 권17] 전라도 병마사이복남(李福男)이 순천(順天)에서 옥과(玉果)에 도착하니, 옥과 현감홍요좌(洪堯佐)가 단신으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복남이 거느리고 왔던 군사들도 흩어졌으므로, 장교 50여 명만 거느리고 나아가다가, 길에서 조방장(助防將)김경로(金敬老)와 산성별장신호를 만나 매우 기뻐서 손을 잡고 함께 죽기를 맹서하면서 말고삐를 나란히 잡고, 남원성(南原城)으로 들어갔다.[『연려실기술』 권17] 그해 8월 왜적이 남원성을 공격하자, 전라도 병마사이복남, 별장김경로, 남원부사임현(任鉉) 등과 함께 왜적과 싸웠으나,[『서계집』 권16 「유사」] 신호는 8월 16일 남원성에서 전사하니, 그때 나이가 59세였다. 죽기 직전에 신호가 말을 달려 싸우려고 나가서,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또 이빨 한 개를 쳐서 부러뜨려 종에게 주면서 집으로 돌아가 집안 사람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7백여 명이 모두 죽었으므로, 그 시체가 쌓인 속에서 그의 시신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남원성의 혈전

1597년(선조 30) 8월 적장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등이 군사를 나누어 진격해 와서 남원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명(明)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홀로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신호가 말하기를, “나는 산성의 장수가 되었으니, 산성을 사수하는 것이 진실로 나의 의리에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성(府城)이 함락된다면, 대사(大事)가 잘못될 것이니, 내가 어찌 차마 좌시하며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양원과 함께 힘을 합쳐서 남원을 지켜내어 왜구를 막으려 하였으나, 성문이 굳게 닫힌 탓에 안팎이 단절되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신호가 곧장 화살에 서찰을 묶어 전후로 세 차례나 성 안으로 쏘았으나, 성 안에서 전혀 응답하지 않았는데, 성이 장차 함락되게 되자, 동문(東門)이 열렸다.

이에 신호가 죽을 각오를 한 병사를 거느리고 성문을 점령하면서 들어가니, 적병이 이미 성에 가득하였다. 신호가 나무에 의지한 채 화살을 쏘아 거의 수백 명의 왜적을 사살하였다. 이윽고 화살이 떨어졌으나, 오히려 큰칼을 들고 홀로 분전(奮戰)하여 격살한 왜적이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동문에서부터 싸우면서 나아가서 서문(西門)에 이르렀는데, 신호가 이르는 곳에는 왜적들이 모두 피하여 달아나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사람과 말이 힘이 다하고 말았다. 신호를 따르던 종이 말고삐를 붙잡고 울며 말하기를,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물러나서 산성을 보전하여 다시 일전(一戰)을 도모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신호가 허락하지 않았다. 종이 더욱 강경하게 간하자, 신호가 칼을 들어 그 팔을 치려고 하니, 종이 붙잡고 있던 말고삐를 놓았다. 신호가 말을 달려 나아가 싸우려고 하면서,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또 이빨 한 개를 쳐서 부러뜨려 종에게 주었다. 그리고 종에게 집으로 돌아가 집안사람에게 알리게 하면서, 말하기를, “내일 내가 응당 죽을 것이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 이것으로 신표를 삼으라.” 하였다. 신호가 8월 16일 성에서 전사하니, 그의 나이가 59세였다. 이 싸움에서 전라도 병마사이복남, 별장김경로, 남원 부사임현이 모두 전사하였다.[『서계집』 권16 「유사」]

1597년(선조 30) 9월 1일 왜적이 남원성을 함락시키니, 명나라 총병(總兵)양원은 도망하여 돌아갔고, 중국 명나라 총병 중군(總兵中軍)이신방(李新芳)과 우리나라 접반사(接伴使)정기원(鄭期遠), 방어사(防禦使)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김경로, 등이 모두 죽었다. 처음에 적장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등이 군사를 나누어 진격해 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이때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있고 천총(千總)장표(蔣表)는 남문에 있고, 모승선(毛承先)은 서문에 있고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서로 여러 날 동안 버티었다. 적병이 나무와 풀로 참호를 메우고 밤을 틈타 육박해 올라와 어지러이 탄환을 쏘아대니, 성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이에 양원은 휘하 몇 사람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서, 겨우 죽음을 면하였고,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는 모두 죽었다. 그 뒤에 중국 명나라에서 혼자 도망친 양원을 죽여서 우리나라 군영에 조리돌리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 9월 1일)

성품과 일화

신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걸출하면서도 장대하고 지기(志氣)가 비범하며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병서(兵書)를 두루 섭렵하였다.[『서계집』 권16] 나이가 약관(弱冠)을 지나 유적(儒籍)에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불행(不幸)히 아사(亞使)의 순강(巡講)에서 낙방(落榜)하자, 그가 발분(發憤)하여 개연(慨然)히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세상에 났다가 오늘의 치욕(恥辱)을 있게 한 것은 유관(儒冠)을 썼기 때문이다.” 하고 곧 썼던 두건(頭巾)을 벗어 손수 스스로 찢어서 마침내 군청 관아 앞쪽 못에 던져 버렸다. 후인(後人)이 이로 인하여 그 못을 ‘투건지(投巾池)’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대개 그가 투필(投筆)하려는 뜻이 그 때에 결단(決斷)된 것이었다. 이로부터 면려(勉勵)하여 낮이면 활을 쏘고 밤이면 글을 읽되 오래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식암유고』 권 22 「낙안 군수 증 형조 판서 신공 시장」]

내행(內行)이 순독(純篤)하고 성효(誠孝)가 출천(出天)하여 내외(內外) 6년상(六年喪)에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치고 죽을 마시면서 끝까지 마치었으되 발이 산(山)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입으로 딴 일을 말하지 아니하니, 당시에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또 그 지조(志操)가 굳건하여 이름은 비록 무변(武弁)이라 하더라도 항상 열사(烈士)의 풍도(風度)를 지녀 권귀(權貴)의 문(門)에 달라붙지 아니하니, 신호가 훌륭한 재략(才略)을 가지고 마침내 곤수(閫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식암유고』 권 22 「낙안 군수 증 형조 판서 신공 시장」]

항상 국사(國事)에 죽기를 자임(自任)하였는데 산성장(山城將)이 되자, 두주(斗酒)를 마련하여 친척들을 모으고 미리 가사(家事)를 부탁하였다. 선조(先祖)의 사당에 하직하고 그 집안 사람들과 친족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만한 곳을 얻었으니, 나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하였다. 또 왜적(倭賊)에게 달려갈 때 평일에 감추어 두었던 손톱 발톱과 머리털을 큰 광주리에 담아서 친히 성명(姓名)을 써서 집안사람에게 부쳐 보내고 떠나더니 마침내 발꿈치를 돌이키지 못하고 적에게 죽으니 그 충절을 위해서 죽은 의리를 여기에서도 이미 알 수 있다.[『식암유고』 권 22 「낙안 군수 증 형조 판서 신공 시장」]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무장(武莊)이다. 그 의복(衣服)과 치발(齒髮)을 황해도 평산(平山) 우일리(雨日里)의 선영(先塋) 곁에 장사지냈으나, 끝내 유해(遺骸)를 찾아서 묻지 못하였다. 식암(息庵)김석주(金錫冑)가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식암유고(息庵遺稿)』 권 22 「낙안 군수 증 형조 판서 신공 시장(樂安郡守贈刑曹判書申公諡狀)」] 전라도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와 충렬사(忠烈詞)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 별집 권4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최진홍(崔鎭洪)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장남 신천기(申天紀)와 차남 신대기(申大紀)는 모두 음사(蔭仕)로 주부(主簿)가 되었다.[『식암유고』 권 22 「낙안 군수 증 형조 판서 신공 시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서계집(西溪集)』
  • 『송파집(松坡集)』
  • 『수은집(睡隱集)』
  • 『식암유고(息庵遺稿)』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이재유고(頤齋遺藁)』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