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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관인리(寬仁里)에 있고, 약천(藥泉) 남구만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정수묘지명」] | 묘소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관인리(寬仁里)에 있고, 약천(藥泉) 남구만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정수묘지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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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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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수 |
한글표제 | 정수 |
한자표제 | 鄭脩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현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공신(公愼)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09년(광해군 1) |
사망 | 1662년(현종 3) 11월 11일 |
본관 | 동래(東萊)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철원부(鐵原府) 관인리(寬仁里) |
증조부 | 정언신(鄭彦信) |
조부 | 정협(鄭恊) |
부 | 정세미(鄭世美) |
모_외조 | 여주 이씨(驪州李氏) : 이상의(李尙毅)의 딸 |
형제 | 정유(鄭攸) |
처_장인 | (첫째 부인)전의 이씨(全義李氏) : 이무림(李茂林)의 딸 →무후 (둘째 부인)안동 김씨(安東金氏) : 김계(金棨)의 딸 →(자녀)2남 2녀 |
자녀 | (1자)정내상(鄭來祥) (2자)정지상(鄭至祥) (1녀)남구만(南九萬)의 처 (2녀)이정만(李庭萬)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수(鄭脩) |
총론
[1609년(광해군 1)∼1662년(현종 3) = 54세]. 조선 중기의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예조 정랑(正郞)과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자는 공신(公愼)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정세미(鄭世美)이고, 어머니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상의(李尙毅)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정협(鄭恊)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鄭彦信)이다. 영의정남구만(南九萬)의 장인이기도 하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방목(榜目)』] 이후 음직(蔭職)으로 추천되어 목릉참봉(穆陵參奉)과 광흥창(廣興倉)봉사(奉事), 장악원(掌樂院)직장(直長),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 등을 역임하였다.[『약천집(藥泉集)』 권26 「외구묘지명(外舅墓誌銘)」 이하 「정수묘지명」으로 약칭]
1650년(효종 1)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2세였다.[『방목』] 1652년(효종 3)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이어 예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 등의 벼슬에 임명되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3년 1월 16일, 효종 3년 4월 6일] 이어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과 병조 정랑(正郞)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영춘현감(永春縣監)이 되었다. 그런데 1655년(효종 6) 5월 조정에서 충청도 지방의 각 고을에 제조하게 한 염초(焰硝)를 각 고을에서 마음대로 사고판 것이 발각되어, 정수(鄭脩)는 다른 고을의 수령들과 함께 파직되고 유배되었다.[『효종실록』효종 6년 5월 15일] 당시 효종(孝宗)이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고 많은 양의 화약을 만들기 위하여 그 원료가 되는 염초를 각 고을에서 제조하게 하였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는 염초를 굽는 방법을 잘 몰라서 다른 고을에서 구운 염초를 사서 공물(貢物)로 바치고 관찰사에게는 자기 고을에서 구운 것이라고 속여서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후 예조 정랑을 거쳐 1657년(효종 8)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효종 8년 4월 30일]
1660년(현종 1)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나서,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의 기년복(朞年服 : 1년복) 주장과 남인(南人)윤선도(尹善道)의 3년복 주장이 대립하였다. 이때 사헌부와 사간원도 서로 대립을 하였는데, 당시 사헌부 지평이었던 정수는 사헌부 대사헌김남중(金南重) 등과 함께 사간원 대사간이경억(李慶億), 사간원 사간박세모(朴世模) 등과 함께 논쟁을 거듭하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년 4월 16일, 현종 1년 4월 21일] 그런 가운데 과거의 강경감시관(講經監試官)으로 자원하여 나갔다가, 고시(考試)를 신중히 못하고 출방(出榜)을 너무 서둘러 하였다며 파면되었다.[『현종실록』현종 1년 4월 22일, 현종 1년 4월 25일] 이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사도시(司導寺) 정(正)을 역임하였다.[「정수묘지명」]
1662년(현종 3)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였다.
성품과 일화
정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몸을 낮추어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신실하였고, 스스로 겸손을 견지하여 담담하였다. 이미 사적(仕籍)에 이름이 올라 공명(功名)의 길이 열렸으므로 쉽게 출세할 수 있었으나, 세력가에게 부탁하여 명예를 구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았다.[「정수묘지명」]
관례(冠禮)을 치르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가 병이 나서 여러 해 동안 낫지 않자 밤새도록 간병하다가 새벽이 되면 목욕을 하고 가묘(家廟)에 기도하였는데, 오래도록 그렇게 하였다. 동생이 일찍 죽자 자기가 사는 집을 홀로된 제수씨에게 넘겨주었다. 가정에서는 화려한 것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고 관청에서는 남은 물건을 사사로이 챙기지 않았다.[「정수묘지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관인리(寬仁里)에 있고, 약천(藥泉) 남구만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정수묘지명」]
첫째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이무림(李茂林)의 딸이었는데, 자녀를 낳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생원(生員)김계(金棨)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사간(司諫)정내상(鄭來祥)이고, 차남은 정지상(鄭至祥)이다. 장녀는 영의정남구만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참봉(參奉)이정만(李庭萬)의 처가 되었다.[「정수묘지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백호집(白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