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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문에 뛰어났고, 저서로는 『다산집(茶山集)』이 있다. | 그는 시문에 뛰어났고, 저서로는 『다산집(茶山集)』이 있다. |
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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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목대흠 |
한글표제 | 목대흠 |
한자표제 | 睦大欽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탕경(湯卿) |
호 | 다산(茶山), 죽오(竹塢)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5년(선조8) 2월 9일 |
사망 | 1638년(인조16) 정월 7일 |
본관 | 사천(泗川)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 |
증조부 | 목희안(睦希顔) |
조부 | 목세칭(睦世秤) |
부 | 목첨(睦詹) |
모_외조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건(鄭謇)의 딸 |
형제 | (형)목수흠(睦守欽), 목서흠(睦叙欽), 목장흠(睦長欽) |
처_장인 | 진주유씨(晉州柳氏): 유해(柳海)의 딸 |
자녀 | (양자)목행선(睦行善): 목장흠(睦長欽) 2자 (서자)목양선(睦良善) (서자)목윤선(睦胤善) (서녀)신숙(申淑)의 처 |
저술문집 | 『다산집(茶山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목대흠(睦大欽) |
총론
[1575(선조8)~1638년(인조16) = 6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 · 죽오(竹塢)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목첨(睦詹)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참판정건(鄭謇)의 딸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현헌(玄軒)목세칭(睦世秤)의 손자이고, 이조 참의목행선(睦行善)의 양아버지다.
선조 ~광해군 시대 활동
1601년(선조34)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한동안 식년시가 폐지 · 연기되었다가 그 때 사마시가 열렸는데, 진사시에서 목대흠이 조희일(趙希逸)과 장원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하였으므로, 비록 아헌을 하였으나 유명하게 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참조.) 1605년(선조38)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 1607년(선조40)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이듬해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어,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를 겸임하였다.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에 들어간 다음, 뽑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는데, 홍문관 당상관의 지도 아래 월 초마다 모여서 글을 짓고 책을 읽은 것을 점검 받았다. 1609년(광해군1) 시강원 설서(設書)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겨서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승진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때 명나라의 책봉사(冊封使)가 왔는데,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다. 1611년(광해군1)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이듬해 암행어사로 차출되어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돌아와 왕[光海君]에게 자세하게 보고하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치렀다. 1616년(광해군8) 분승지(分承旨)에 임명되었고,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정사권경우(權慶祐)와 함께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북쪽 변경 지대에 군량미를 운반하는 북도(北道) 독운사(督運使)가 되어 평안도에서 군량미를 관리하며 변경의 요새로 군량미를 공급하고,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에게도 군량미를 원조하였다. 1619년(광해군11) 치제관(致祭官)에 임명되어, 평안도 의주(義州)의 건너편 진강(鎭江)으로 가서 명(明)나라 총병유정(劉綎)과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들이 <만주 심하(深河)의 사르호 전투>에서 후금(後金)의 누르하치와 싸우다가 모두 장렬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유 총병은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되어 왜적과 싸운 명나라 대장이었다. 광해군의 폭정이 점차 심해지자, 그는 벼슬할 뜻을 잃어버리고 산관(散官)의 반열에서 10여 년을 보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였다고 하여 태복시(太僕寺) 정(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서 사가독서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 때 체찰사(體察使)영의정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반란을 평정하고 나서 호종(扈從)한 신하들을 포상할 적에 그는 예조 참의로 승진되었다. 1625년(인조3) 정3품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629년(인조7) 인조의 명령을 받고 평안도 철산(鐵山)가도(椵島: 피도)로 가서 명나라 도독(都督)모문룡을 만나서, 후금의 군사가 사포(蛇浦)를 침범한 것과 조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여, 그 오해를 풀었다. 이에 인조가 대단히 기뻐하며,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용양위(龍驤衛)부호군(副護軍)으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천추사(千秋使)에 의망(擬望)되었으나, 후금이 요동(遼東) 반도를 점령하여 중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사신으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633년(인조11)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강릉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었다. 강릉에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어 관리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서, 그가 떠난 뒤에 그 고장 사람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그 뒤에 벼슬에서 은퇴하여 한가롭게 지내다가, 1638년(인조16) 정월 7일에 죽었는데, 향년이 64세였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고, 저서로는 『다산집(茶山集)』이 있다.
모문룡과 화해 교섭
요동 반도가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정복당하자, 요동에 살던 한족(漢族)들이 배를 타고 우리 나라 평안도 철산 앞 바다에 있는 가도로 몰려왔다. 명나라 패잔병 출신의 모문룡이 이들 수만 명의 피난민을 통솔하고 스스로 명나라 도독 행세를 하면서 자체 군사를 조직하고 배를 징발하여,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게 군량미를 요구하였다. 조선은 그가 군량미를 요구할 때마다 평안도 군량미를 지원하였는데, 1616년(광해군8) 광해군 때에는 목대흠이 북도 독운사가 되어 평안도에서 군량미를 관리하면서, 모문룡의 요구대로 군량미를 가도로 자주 실어 보냈다. 그때마다 모문룡과 만나서 서로 우의를 다졌고, 모문룡은 목대흠을 신뢰하였다. 요동의 피난민이 가도뿐만 아니라, 철산의 사포에도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명청(明淸) 교체시기에 후금과 조선 사이에 모문룡의 군사가 중요한 현안 문제가 되었다. 명나라는 모문룡의 실세를 인정하여 모문룡과 조선이 협력하여 후금을 공격하라고 요구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은 조선의 평안도에 들어와서 모문룡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모문룡이 가도에서 여전히 기승을 부리자, 1629년(인조7) 후금의 군사 수천 명이 사포를 침범하였는데, 조선은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은 조선에서 후금의 군사를 불러들인 것으로 오해하여, 명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인조는 “목대흠이 일찍이 접빈사(接儐使)가 되어 그의 환심을 얻은 적이 있다.” 하고, 목대흠에게 명하여 가도로 가서 화해를 하게 하였다. 목대흠이 가교(駕轎)를 타고 급히 가서, 모문룡을 만나니, 모문룡이 그의 해명을 듣고 다시 조선을 의심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목대흠에게 문금(文錦) · 증백(繒帛)의 고급 비단과 진귀한 도자기를 선물로 주면서 사례하였다. 목대흠이 복명(復命)하고 나서 선물 받은 물품을 호조에 귀속시키겠다고 주청(奏請)하자, 인조가 가상히 여겨서 그 물품을 목대흠의 집으로 보냈다. 나중에 사헌부에서는 목대흠이 사명을 받들고 가면서 가교를 탔다고 탄핵하였으나, 인조가 용서하여 주었다.
성품과 일화
목대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말이 적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천성이 고결하고 이해득실(利害得失)에 따라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세상의 권세와 이익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면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항상 애를 썼으며, 어머니의 방을 ‘주경(駐景)’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하루하루를 아낀다[愛日]’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금촌리(金村里)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25 「다산 목공 묘갈명(茶山睦公墓碣銘)」) 죽은 뒤에 정3품하 통훈대부홍문관 교리(校理)에 추증되었다.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는 훈련원(訓鍊院)정(正)유해(柳海)의 딸인데, 자식이 없어서 조카 목행선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석담집(石潭集)』
- 『오리집(梧里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