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정(還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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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부세제도인 삼정을 구성하는 전정·군정·환정 중 하나.

개설

환곡은 본래 진휼의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 환곡을 통하여 얻는 이자 수익이 점차 부세(賦稅)화되면서 환정으로 정착되었다. 환정은 전정(田政)·군정(軍政)과 함께 삼정(三政)이라는 이 시기의 특징적인 부세제도 중 하나였다.

조선후기 환곡은 분급 후 원곡과 함께 모조(耗條)를 상환하게 함으로써 자연 손실분을 채우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여기에 모조가 중앙 기관으로 회록(會錄)되기 시작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에서는 환곡을 설치하고 그 수익을 재정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사실상 환곡이 부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환곡은 점차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전정·군정과 함께 삼정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환곡의 본래 기능인 진휼의 성격이 약화된 점과 환곡이 부세화되는 과정에서 각종 폐단이 나타난 점을 둘러싸고 개혁, 즉 이정(釐正) 방안이 논의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면 환곡을 빌려 간 후 갚지 않은 포흠(逋欠)의 액수가 커져서 더 이상 환곡을 실질적으로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백성의 저항도 거세지자 국가는 결국 환곡을 폐지하고 이자, 즉 모조에 해당되는 액수를 토지에 부과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특히 1867년(고종 4) 사창제(社倉制)가 시행되면서 환정은 변화의 흐름을 탔고(『고종실록』 4년 6월 6일),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결호세제도(結戶稅制度)가 시행되면서 환곡은 사환곡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환정의 의미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부세제도는 국가가 토지·인신(人身)·호구(戶口)에 대하여 각각 생산물·노동력·공물을 수취하는 조용조(租庸調)의 형태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조용조제도는 차츰 변화하기 시작하여 17, 18세기를 거치면서 변질되어 갔다. 전세(田稅)는 조선전기 연분율(年分率)에 의한 정율세제(定率稅制)에서 영정법(永定法)이라는 정액세제(定額稅制)로 바뀌었다. 인두세 성격의 군역은, 군포 수취를 1년에 2필에서 1필로 줄이고 그에 따른 부족분은 토지세나 그 밖의 세로 보충하는 균역법(均役法) 체제로 전환되었다. 또 호구세 성격의 공물은 토지를 기준으로 하는 대동법으로 진전되었다.

이와 같이 변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중요한 부세 항목들은 그 부과 대상이 토지로 집중되었고, 그 부과 액수도 고정되어 갔다. 전세는 토지 1결에 4~6두로 고정됨에 따라 전체 부세 중에서 그 비중이 줄어들었고, 대동세는 12두 정도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줄어든 군포를 메우기 위하여 신설된 결작(結作)도 쌀 2두(5전) 정도를 거두었다. 반면 국가 재정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기존의 부세 수입만으로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때 환곡은 새로운 세원으로 등장하여 국가 재정의 부족분을 충당해 주었다.

내용

환곡은 조선전기부터 국가의 예비곡(豫備穀)이었던 군자곡(軍資穀) 중 일부를 이용하여 농민에게 빌려준 곡식을 의미하였다. 농민은 이 곡식을 식량 또는 다음 농사를 위한 종자곡으로 사용함으로써 재생산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편 환곡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자연 감소분을 보충하는 방편으로 모조를 수취하였는데, 이때 모조는 단순히 원곡을 채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모조를 고을 단위에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소된 환곡을 채우기도 하고 나아가 고을의 여러 재정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지방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6세기 이후 수취제도가 변하는 가운데 전정과 군정의 수취 액수가 고정되면서 국가 재정은 부족하게 되었고, 이러한 부족분을 환곡으로 메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환곡은 삼정의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환정(還政)’이라 불리게 되었다.

변천

환정 하에서 환곡의 운영은 크게 변하였다. 재정에 활용하기 위하여 환곡 총액과 분급율(分給率)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분급 방식에서도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 또 화폐 사용이 증가하면서 고리대적 운영이 강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환곡제는 그 모순을 크게 드러내면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분급되는 환곡의 질이 떨어지고 수납의 부담이 커지면서 농민들은 환곡받기를 꺼렸다. 한편으로는 환곡의 포흠과 운영 과정의 문제점으로 환곡이 단지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虛留)가 늘어나면서 분급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환곡의 분급·수납 방식이 사라져 가고 모조만을 토지나 호구에 배정하여 세금처럼 거두는 백징(白徵)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환곡 운영상의 변화는 예비곡의 설치라든지 재해 시의 구휼이라는 환곡의 본래적인 성격에서 이탈하여 환곡이 부세화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미 부세 체제로서의 환정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운영의 폐단이 심각해져도 국가에서는 이를 유지·강화하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환곡 총액을 정비하고 환곡의 소멸을 방지하며 이미 허류화(虛留化)된 상당액의 환곡을 다시 채워 넣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포흠분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는, 수년 간 기한을 두고 모조를 제외한 포흠분을 채워 넣도록 하는 ‘한년배봉(限年排捧)’의 방식을 주로 이용하였다.

또한 환곡이 차지하고 있는 재정을 다른 곳에서 마련하기 위하여 새로운 부세원을 찾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토지와 호구에 부담 지웠다. 그것의 대표적인 방법이 ‘결가취잉(結價取剩)’ 곧 ‘도결(都結)’의 형태였다. 도결은 관에서 결세(結稅)를 책정할 때 여기에 여러 명목으로 부가적인 세금을 덧붙여서 부족한 재용을 채우는 방식이었는데 환곡 포흠의 충원에 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환정을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백성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늘어날 뿐이었다. 게다가 주로 서리가 자신의 사적인 부를 챙기면서 환곡의 부족분이 커진 것이었는데 이것을 백성에게 전가하자 이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환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고을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읍에 부과된 환곡 총액을 줄이거나 포흠을 줄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수령들은 향회(鄕會)를 통하여 백성의 의사를 반영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하였지만 결국 토지나 호구에 세금을 더 부과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국가 혹은 지방관의 환정 운영은 다수의 백성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이에 19세기 들어 백성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관청에 연명(聯名)으로 하소연하는 등소(等訴) 운동이 일어나 이것이 봉기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읍민들은 부당한 환곡의 부담에 저항 수준을 넘어서 환정의 개혁까지 요구하였다. 그 내용은 환곡의 부세화 추세를 현실로 인정하고 이를 제도화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환정 체제의 형성과 운영, 그리고 이에 따른 모순의 폭발로 인하여 1862년에 전국적으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농민 항쟁 이후 국가는 환정의 개정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국가에서 구상한 것은 ‘파환귀결(罷還歸結)’의 방안이었다(『철종실록』 13년 윤8월 11일). 이는 환곡을 없애고, 모조로 충당하고 있던 재정을 토지에 결당 2냥씩 부과하여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환곡제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고 있었던 모조의 부세화라는 현실적 추세를 조정에서 수용하여, 이것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제도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이와 같은 당초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되어 전면적인 시행이 유보되었다. 가장 큰 난관은 부세 구조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결전(結錢)을 운영하게 되자 이것이 토지세의 추가 부담으로 인식되어 이에 대한 백성의 반발이 나타난 점이었다. 또한 환곡을 없애는 대신 항류곡(恒留穀)을 설치하려 한 것도 무리였다. 항류곡이란 흉년에 대비하여 창고에 1,500,000석을 저장해 두되, 빌려줄 때에는 이자 없이 빌려주도록 한 곡식이었다. 전반적으로 이 제도는 기존의 환곡제로 인하여 이익을 보고 있던 계층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전면적인 시행이 어려웠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다시 환곡 유지책을 답습하여 허류화된 환곡의 일부를 탕감해 주고 환곡 총액을 새로이 분배하는 ‘탕포균환(蕩逋均還)’의 방식을 채택하였다(『고종실록』 29년 6월 29일). 그러나 환곡의 허류화가 지나치게 심각하였던 충청도와 평안도에서는 대원군 정권 초기에 파환귀결을 시행하여 환곡 개정책을 부분적으로나마 계승하였다.

대원군 정권기 환정의 가장 큰 변화는 환곡을 복구하거나 중앙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기존의 환곡과는 달리 별도로 별비곡을 설치한 점이었다. 1866년(고종 3)에는 내탕금 300,000냥으로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 등 6개 도에 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 100,000석을(『고종실록』 3년 5월 12일), 1867년(고종 4)에는 당백전 1,500,000냥으로 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 등 4개 도에 호조별비곡(戶曹別備穀) 500,000석을 마련하였다. 호조별비곡은 정묘별비곡(丁卯別備穀)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대원군시대는 별비곡을 활용하여 국가 재정을 지탱해 나가고자 시도하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사창법을 도입하였다. 사창법은 부세 운영을 근간으로 하는 환정 체제에서는 도입하기 어려웠는데 이를 전국적으로 시행한 것은 상당히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별비곡을 설치하기 위하여 새로운 화폐인 당백전(當百錢)을 이용하였고, 그 수익도 국가 재정에 활용되었다. 또한 사창의 운영도 결국은 관이 개입하여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게다가 민씨 정권(閔氏政權)이 들어서면서 대원군의 재정정책을 모두 파기하였고 별비곡의 원곡마저 재용으로 쓰면서 환정은 더욱 형해화(形骸化)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결호세(結戶稅)제도가 시행되면서 삼정 체제는 무너졌다. 이때 결세로서 책정된 결전(結錢)은 본래 결가(結價) 상승과 그에 따른 폐단을 해결하고, 전국적으로 일률적인 화폐납을 하게 하여 중앙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이처럼 환곡의 모조가 담당하던 재정은 결세 속에 포함되었다. 결국 삼정 체제의 한 축이었던 재정 보용책으로서의 환정도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남은 환곡은 사환곡으로 전환되었고, 환곡의 본래적 기능인 진휼의 기능을 살리기 위하여 사환제(社還制)가 실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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