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田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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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토지에 부과된 각종 조세를 일괄적으로 거두어들이기 위한 행정제도.

개설

17세기 중엽인 효종대부터 사용된 용어로 알려졌다. 그 이전에는 전제(田制)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전정은 전제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후기 전정은 군정 및 환정과 더불어 삼정의 하나로서 정부 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다.

전정은 2가지 특징이 드러났다. 첫째는 그 규모의 확대였다. 전정의 규모는 임진왜란 이후로 공납과 부역의 전세화 추세 속에서 크게 확대되었다. 각종 잡역세 이외에도 정규적인 전세로서 훈련도감의 삼수미(三手米), 대동법의 대동미(大同米), 균역법의 결작(結作) 등이 토지에 덧붙은 것이었다. 이는 신분제에 기초한 공납과 부역이 점차 토지세로 전환되는 추세의 결과였다. 전기의 공납과 부역을 담당하던 자영농 중심의 농민층이 분화되고, 지주층이 확대되던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둘째는 비총법(比摠法)에 기초한 군현별 결총(結總)의 고정 현상이었다. 1634년(인조 12)의 갑술양전과 1720년(숙종 46)의 경자양전을 거치면서 경작되지 않고 비어 있던 한광지(閑曠地)의 개간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적극적인 양전정책에서 소극적인 양전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결총의 증가를 지양하고 백징(白徵) 해소를 위하여 필요한 만큼 은루결(隱漏結)을 조사하였다. 또한 정부가 직접 군현의 재결(災結) 규모를 결정하여, 수세 대상이었던 실결(實結)의 규모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지주층과 군현의 은루결이 점차 증가하여 중앙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동시에 영세한 농민층에게 그 부담을 전가시켰다. 이로써 조선후기 전정의 모순이 확대되었으며, 19세기 농민 항쟁을 일으키는 동인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의 전제나 조선후기의 전정은 측량을 통하여 수취 대상이 되는 토지 규모를 파악하는 양전과 이를 통하여 전세를 수취하는 조세의 두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양전제는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이 제정되면서 체계화되어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으로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 핵심 내용은 정부가 20년에 1회씩 토지조사를 실시한다는 것과 토지조사는 결부제(結負制)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침은 애초부터 지켜지지 않았는데, 문제의 핵심은 결부제에 있었다. 즉, 각 토지의 면적을 측량하고 비옥도에 따른 생산력을 6개 등급의 전품으로 분류하여 토지 등급과 면적을 동시에 반영한 결부수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척박한 6등전 1결과 비옥한 1등전 1결은 동일한 생산력과 전세액을 나타내지만 그 실제 면적은 일정한 비율에 따라 서로 달랐다. 이를 동과수조제(同科收租制) 혹은 이적동세제(異蹟同稅制)라 불렀다. 공법의 6등 전품에 따른 결부제는 고려시기에 비하여 향상된 조선전기의 토지 생산력을 표준화한 것으로서 중앙정부의 토지 지배력을 제고하고 전세 행정을 간소화하였다. 하지만 실제의 양전 과정에서 토지의 등급은 객관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중간 농간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하여 6개 전품에 따른 결부제는 제정 초기부터 후기까지 많은 논쟁을 유발하였다.

조선후기 전세 수취는 영정법과 비총법으로 운영되었다. 영정법은 각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수세액을 고정하고 풍흉에 관계없이 고정된 수세액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9등급 토지의 결당 수세액은 상상전 쌀 20두에서 2두씩 체감하여 하하전에 이르면 쌀 4두가 되었다. 9등급의 비척도는 도별로 차이를 두었다. 경상도는 최상급 토지를 상하전 쌀 16두, 전라도·충청도는 최상급 토지를 중중전 쌀 12두, 기타 5도는 하하전 쌀 4두로 각각 차이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도 대부분의 토지가 하중전·하하전이었으므로 실제의 전세는 4∼6두 수준이었다. 전세 외에도 1결당 대동미 12두, 삼수미(三手米) 2두, 결작(結作) 2두 등의 부가적인 정규 부세가 있었고, 그 위에 수수료·운송비·자연 소모비 등 각종 잡세도 부가되었다.

영정법에서 전세의 수취는 먼저 가을에 답험(踏驗)을 통하여 전세의 부과 대상 및 감면 대상을 파악한 뒤, 호조가 공인한 급재결수(給災結數)를 제외한 나머지 실결(實結)에서 전세를 징수하였다. 즉, 매년 호조가 그해의 풍흉을 참작하여 연분사목(年分事目)을 작성해 각 도에 보내면, 수령이 관내 경지의 재해 사실과 경작 여부를 조사하였다. 이를 감사가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면 중앙 정부는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해 심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전세가 면제되는 대상 결수가 결정되면 각 지방의 관청은 이를 토대로 각종 전세를 징수하였다. 하지만 각 지방의 수령 답험과 중앙에서 파견된 경차관의 심사가 형식화되었고, 대동법 실시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급재결수를 분급하는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숙종대부터 점차 시행되기 시작하여 영조대에 법제화된 비총법이 그것이었다.

비총법 내용은 경차관 파견을 폐지하고 매년 호조가 그해의 농사 상황과 기준 연도를 비교하여 전세의 감면 대상인 급재결과 전세의 부과 대상인 실결의 총수를 정한 연분사목을 작성하여 각 도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호조가 연분사목을 반포하면 각 읍의 수령은 관내의 경지를 답험해 재실 상황(災實狀況)을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이를 다시 조사하여 전체 읍을 초실(稍實)·지차(之次)·우심(尤甚)의 3등급으로 나누어 급재결수를 분급하였다. 각 읍은 도에서 받은 급재결수를 토대로 다시 각 면·리(面里)에 급재결수와 실결수를 정해 주었다. 비총법은 국가의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시행되었다.

변천

전정의 전세제 부분은 양전제와 달리 조선후기에 이르러 크게 변하였다. 근간은 공법에서 영정법과 비총법으로의 변화였다. 전기의 전세제는 1444년(세종 26) 제정된 공법을 모체로 하였다. 전분6등과 연분9등이 그것이었다. 전분6등은 정부의 양전을 통해서 모든 토지의 전품을 6개 등급으로 확정하는 것으로서 각 토지의 결부(結負)에 반영되었다. 연분9등은 매년 수령과 감사가 보고한 작황을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규정대로 한다면 공법하의 각 토지는 54개 등급의 세액 차이를 가진 셈이었다. 태종대 제정된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 답험의 자의성을 심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세종대의 공법은 이러한 문제점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식으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실제 연분9등은 점차 형식화되어서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최하등급인 하하년으로 고정되었다. 이러한 관행이 임진왜란 이후에 영정법으로 제도화되었다. 1634년(인조 12) 정부는 연분9등을 각 도별로 차등을 두어 고정시키고 매년 풍흉의 작황을 살펴 급재(給災), 즉 재해 정도에 따라 일정한 면세액을 분급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실효성이 없던 연분9등이 전품 9등급으로 고정되었지만, 결부제에 반영된 6등전품제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 제도를 영정법이라 하였다. 이어서 숙종대부터는 매년 작황의 답험을 통하여 급재(給災)하던 방식도 비총법으로 바꾸었다. 작황의 답험 과정에서 중간 농간이 확대되자 호조가 직접 각 군현의 농사 결과 보고를 바탕으로 급재 액수를 결정한 것이었다. 비총법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시행되었다.

영정법과 비총법으로 운영되던 조선후기 전정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큰 변화를 겪었다. 농업생산력의 변화와 지주전호제의 확대가 전정의 구조를 견인하였다.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일반화되면서 직파법에 의존하던 전기보다 후기의 농업 생산성이 크게 발전하였다. 아울러 병작반수로 경영하는 지주전호제가 확대되면서 지주층의 토지 소유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삼수미·대동미·결작처럼 신분제에 의존하던 조세가 점차 토지에 집중되어 토지 소유자의 조세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지주층의 각종 전세 부담이 병작 농민에게 전가되거나 관료층과 지주층이 공유하던 은루결이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로써 조선후기 삼정 문란의 하나인 전정의 폐단이 심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1862년 농민 항쟁으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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