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험(踏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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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황의 손실 정도를 직접 조사하여 수세액을 결정짓는 것.

개설

고려말 전제개혁 때 정비된 답험에서는 손실(損實) 정도를 10등급으로 구분하여 평상년(平常年)의 수확에 비해 1/10이 감소하면 전세도 1/10을 줄여 주는 방식[隨損給損]을 적용하였다. 이후 조선 태종 때부터는 답험 방식을 바꾸어 답험위관(踏驗位官) → 수령 → 관찰사 → 호조(戶曹) → 손실경차관(損實敬差官) → 호조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였다. 한편 1417년(태종 17)부터는 과전(科田)과 같은 사전(私田)에 대한 손실경차관의 답험손실도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의 실시로 종래의 답험손실 방식도 바뀌었다. 매년 9월 15일 이전에 수령(守令)이 모든 경작지에 대해 연분등제(年分等第)를 심사하여 정하고 관찰사가 다시 심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의정부와 육조가 함께 의논한 다음 연분경차관(年分敬差官)을 파견하여 다시 심사하였고,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전세의 수취 액수를 확정지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말 전제개혁으로 수전(水田) 1결에 조미(糙米) 30말[斗], 한전(旱田) 1결에 잡곡(雜穀) 30말을 전세로 수취하는 규정, 즉 1/10조율(租率)이 정비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평상년의 수조액을 규정한 것이었다. 해마다 농사의 작황이 같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작황에 따라 수세액(收稅額)을 조절해야만 하였다. 이렇게 작황을 직접 조사하여 수세액을 결정짓는 것이 답험이다.

내용

1391년(공양왕 3) 5월에 정비된 답험 규정에 따르면, 모든 농경지의 손실 정도를 10등급으로 구분하였다. 평상년의 수확에 비해 1/10이 감소하면 전세도 1/10을 줄여 주되, 이런 방식에 따라 전세 부과액을 줄여 가다가 수확이 8/10 이상 감소하면 전세를 모두 면제시켜 주었다. 국가나 기관 수세지의 경우에는 먼저 해당 고을 수령이 직접 손실을 심사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임시로 뽑아 임명한 위관(委官)을 보내 다시 심사한 다음, 감사와 수령관(首領官)이 거듭 심사하여 손실의 정도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전세를 줄여 주었다. 만약 답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에는 담당자를 처벌하였다. 반면에 과전(科田)과 같은 개인 수조지(收租地)의 손실은 해당 전지의 수조권을 가진 사람[田主]이 스스로 심사하여 전조(田租)를 거두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태조 2)에는 손실의 정도가 2/10 이하일 경우에도 전세를 감면하지 않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이어 태종 때에는 일괄적으로 손실의 정도에 맞게 전세를 줄여 주는 이른바 ‘분수답험(分數踏驗)’ 방식으로 바꾸었다(『태종실록』 5년 9월 17일). 아울러 답험 방식도 바뀌었는데, 먼저 해당 지방에 거주하는 품관(品官) 가운데에서 답험위관(踏驗位官)을 골라 뽑아서 손실의 정도를 답험하도록 하였다. 답험위관은 뒷날 손실답험관(損實踏驗官)으로 바뀌었다. 그 뒤 지방관이 직접 심사하여 관찰사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관찰사가 이를 다시 조사하여 문서로 작성하여 호조(戶曹)에 보내면, 호조는 손실경차관을 파견하여 다시 심사하게 한 뒤 비로소 전세의 수취액을 확정 지어 호조에 보고하였다. 호조는 이를 손실도목장(損實都目狀)에 기록하여 전세 수취의 근거로 삼았다(『태종실록』 9년 5월 29일).

손실경차관의 업무는 그해에 농사를 지은 땅인 기경전(起耕田)에 대한 답험손실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었다. 진황전(陳荒田)이나, 수령이 보고하지 않은 새로운 가경전(加耕田) 등을 찾아내어 면적과 전주(田主)의 성명 등을 기재한 장부를 만들어 해당 고을의 관아에 보관하는 일도 포함되었다(『세조실록』 4년 9월 19일). 한편 1417년부터는 과전과 같은 사전에 대한 손실경차관의 답험손실도 시행되기 시작하였다(『태종실록』 17년 11월 25일)(『세종실록』 1년 9월 19일). 비록 답험 과정에서 향리·위관·지방관·경차관 등이 답험에 필요한 경비를 농민에게 전가시키거나 손실의 정도를 실제와 달리 인색하게 책정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드러났지만, 국가는 전세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러한 답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변천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의 실시로 전세의 산출 방법이 답험손실에 의한 정율수세(定率收稅)에서 연분9등(年分九等)과 전분6등(田分六等)에 의한 정액수세(定額收稅)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답험손실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매년 9월 15일 이전에 수령이 모든 경작지에 대해 연분등제(年分等第)를 심사하여 정하고, 관찰사가 다시 심사하여 왕에게 보고하면, 의정부와 육조가 그 내용을 함께 의논하여 다시 왕에게 보고한 다음 전세를 거두어들였다. 다만 자연재해로 농작물이 피해를 당하였거나 농부의 질병 등으로 경작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해당 경작자[佃夫]가 문서를 작성하여 신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권농관(勸農官)이 그것을 직접 심사하여 8월 15일 이전까지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현장에 직접 가서 수확 상황을 파악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관찰사는 사실을 확인하여 장부에 등재한 뒤 수령으로부터 보고받은 문서[立案]를 수령에게 돌려주고, 9월 15일 이전까지 왕에게 보고해야 하였다. 그러면 중앙정부는 연분경차관(年分敬差官)을 파견하여 다시 심사한 다음 왕에게 보고하여 전세의 수취 액수를 확정지었다. 연분경차관은 1760년(영조 36)에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 이장우, 『조선 초기 전세 제도와 국가 재정』, 일조각,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