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역(賤役)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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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천역 |
한글표제 | 천역 |
한자표제 | 賤役 |
관련어 | 간척(干尺), 신량역천(身良役賤), 제태(除汰), 칠반천역(七般賤役) |
분야 | 사회/사회구성원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임학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천역(賤役)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1년 5월 29일, 『예종실록』 1년 10월 23일, 『영조실록』 9년 11월 5일 |
고려·조선시대 천인 신분에 해당하는 자가 국가에 대하여 부담하는 신역(身役).
개설
고려·조선시대는 호적 조사를 통해 파악된 인정(人丁)을 대상으로 국역(國役)을 부과하였다. 따라서 국역은 신역(身役)이며 신분에 따라 양인(良人) 신분이 부담하는 양역(良役)과 천인(賤人) 신분이 부담하는 천역(賤役)으로 구분되었다.
고려부터 조선시대 천인 신분의 대다수는 노비였기에 천역은 일반적으로 노비, 특히 국가가 공적 소유권을 가진 공노비(公奴婢)가 부담하는 역을 말한다. 조선시대 공노비는 16~59세까지 중앙 각 관서 및 지방 각 관아, 병영, 역원(驛院), 향교(鄕校) 등에 배속되어 국역을 부담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의 천역을 말할 때 ‘칠반천역(七般賤役)’이라 하여 가장 천대받던 7가지의 국역 종사자를 일컫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조례(皁隸)·나장(羅將)·일수(日守)·조군(漕軍)·수군(水軍)·봉군(烽軍)·역보(驛保) 등을 말하였다. 대체로 이들은 신분은 양인이나 노비와 같은 천역을 지고 있었기에 ‘신량역천(身良役賤)’ 층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천역은 노비의 경우 거의 자손에게 세습되었지만, 간혹 상벌(賞罰)로 인하여 천역에 종사하게 되거나 천역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천역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노비가 해방되고 국역 부과 체제가 새롭게 바뀌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천역은 주로 국가 공공기관에 소속된 공노비가 부담하였는데 이들은 16세부터 59세까지의 기간 동안 자신들이 속한 관서에서 노역(勞役)을 부담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노비를 입역노비(立役奴婢)라 하였다. 입역노비의 종류는 서울 각 관서 및 궁궐에 소속되어 잡역에 종사하는 차비노(差備奴), 지방 각 고을의 관아 및 병영, 역원, 향교 등에 배정된 외방(外方)노비, 그리고 왕족 및 고관의 시중을 드는 근수노(跟隨奴) 등이 있었다.
또한, 공노비가 종사하던 각종 잡직(雜職)도 천역에 해당되었는데, 문반(文班) 잡직으로는 공조(工曹)를 비롯하여 액정서(掖庭署)·교서관(校書館)·사섬시(司贍寺)·조지서(造紙署)·사옹원(司饔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선공감(繕工監)·장악원(掌樂院)·장원서(掌苑署)·도화서(圖畵署) 등의 관서에서 궁궐 문의 자물쇠와 열쇠 관리, 서적 인쇄, 필연(筆硯: 붓과 벼루) 공급, 화폐 제조, 종이 제조, 요리, 바느질, 말[馬] 사육, 무기 제조, 토목 공사, 악기 연주, 제수(祭需) 물품 공급, 그림 그리기 등이 있었다.
한편, 공노비가 지는 천역 외에 ‘칠반천역’이라 하여 조례·나장·일수·조군·수군·봉군·역보 등의 국역 종사자도 천역에 해당하였다. 조례는 중앙 관서나 종친·관리에게 배속되어 수종(隨從)·호위(扈衛)·심부름 등을 수행하였으며, 나장은 중앙의 사정(司正) 또는 형사 업무를 담당하는 관서에 소속되어 경찰·옥지기의 일, 순라(巡邏)·형벌 집행 등의 일을 맡았다. 일수는 지방의 각 관아나 역원에서 사객영송(舍客迎送)·영조(營造)의 일과 관둔전(官屯田)·역전(驛田)을 경작하는 일을 맡았으며, 조군은 세곡의 조운(漕運), 파선(破船)의 수리, 소금 생산, 선박의 간수 등을 맡았다. 수군은 해상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격퇴하기 위하여 선상(船上)에서 근무하며, 그 밖에도 둔전 경작, 어염이나 기타 해산물 채취, 병선 수리, 축성 등의 잡역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봉군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한 봉수대에서 밤낮으로 횃불과 연기를 올리고 경계하는 일을 맡았으며, 역보는 전국 각 처의 역(驛)에 소속되어 사신의 생활용품을 대어 주거나, 공문서 전달, 역마(驛馬)의 사육과 관리, 역전(驛田)의 경작 등 잡다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들 칠반천역에 종사하는 자들은 대체로 양인 신분이었으나 그 역이 노비 신분이나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고역(苦役)이었기에 소위 ‘신량역천’ 층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신분 질서 상 이들은 양인과 천인의 중간 계층으로 분류, 취급되었다.
이러한 천역은 노비의 경우 거의 자손에게 세습되었지만, 완전히 고정불변인 것은 아니었다. 양반 관료도 죄를 짓게 되면 먼 지역으로 귀양을 보내 천역에 속하게 하였으며(『세종실록』 31년 5월 29일), 양인 신분인 자들도 죄를 지었을 경우 천역을 부담하게 하였다. 반면, 천민 가운데 도적을 포획(捕獲)한 경우 천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예종실록』 1년 10월 23일). 또한, 상벌(賞罰)과 무관하게 가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양인의 경우 스스로 천역에 소속되어 몸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영조실록』 9년 11월 5일).
변천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가 해방되고 국역 부과 체제가 새롭게 변하면서 천역에 종사하는 자들 또한 법제상 모두 사라지게 된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유승원, 『조선 초기 신분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7.
- 전형택, 『조선 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89.
- 지승종, 『조선 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95.
- 김석형, 「이조 초기 국역 편성의 기저」, 『진단학보』14, 1941.
- 이성무, 「조선시대 노비의 신분 지위」, 『한국사학』9, 1987.
- 이수건, 「조선 태종조에 있어서의 대노비 시책」, 『대구사학』1, 1969.
- 임영정, 「조선 초기 공천에 대한 연구: 외거노비의 성립을 중심으로」, 『사학연구』23, 197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