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량역천(身良役賤)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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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량역천 |
한글표제 | 신량역천 |
한자표제 | 身良役賤 |
관련어 | 칭간자(稱干者), 칭척자(稱尺者),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 보충군(補充軍) |
분야 | 경제/재정/역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송양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량역천(身良役賤)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1월 4일, 『태종실록』 15년 3월 8일 |
조선초기 신분은 양인이지만 천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봉수간·염간·진척·화척 등 칭간칭척으로 불린 계층.
개설
신량역천 계층은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신분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로서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계층으로 보충군(補充軍)이라는 병종에 속해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은 신분보다 그들이 지는 역의 특수성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갔다.
담당 직무 및 변천
조선왕조는 건국 직후 통치체제를 쇄신해가는 가운데 신분제 역시 정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신분은 양인인데 지는 역이 천한 신량역천 계층이 나타나게 되었다. 신량역천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칭간칭척자’였다. 칭간칭척자들은 대부분 특정 기관에 소속되어 군역 이외에 특수한 역역(力役)에 종사하거나 일정액의 현물을 부담하였다. 정부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능·묘 등에 제사와 수호를 위하여 마련해 둔 위전(位田)을 지급하거나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칭척자는 신라 이래 신분과 역을 세습해 온 천역 부담자였고, 칭간자는 고려전기까지 ‘척(尺)’으로 부르던 일단의 천역 부담자가 후기에 와서 ‘간(干)’으로 대체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 양인들과는 구분되는 존재였다. 1392년(공양왕 4)에 문적이 분명하지 않은 자와 천부(賤夫)·양녀(良女) 사이의 소생을 양인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1401년(태종 1) 양(良)·천(賤)이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교혼(交婚)한 남녀를 별거시킴과 동시에 노주(奴主)를 처벌하고 그들의 소생을 신량역천으로 선언하였다. 사실상 이 무렵 신량역천 계층이 탄생한 셈이었다.
신량역천의 실질적인 내용은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키면서도 관리로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이들에게 천역을 부담시킨 것은 칭간칭척자의 선례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는 이들을 천역 대신 신역, 즉 군역에 충당하였지만 사재감 수군이라는 특수한 군역에 몰아넣음으로써 일반 양인과 구분하였다. 동시에 관직에 진출하는 자격을 불허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관철시켰다(『태종실록』 14년 1월 4일). 이러한 방침은 태종 말년에 와서 일정한 제한을 가하되, 관직 진출을 일부 허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들을 한곳에 모아 놓기 위하여 사재감수군(水軍) 대신 보충군(補充軍)이라는 특수한 병종을 신설하였다. 이에 염간(鹽干)을 제외한 모든 칭간칭척자는 보충군의 입속 대상이 되었다(『태종실록』 15년 3월 8일). 비록 서울에 와서 역을 행해야 한다[赴京入役]는 부담으로 인하여 기피자가 속출하였지만 그 반대의 측면도 있었다. 즉, 칭간칭척자가 보충군안(補充軍案)에 들어가게 되면 이전까지의 역이 면제되었을 뿐 아니라 입역을 마치고 서반의 대장(隊長)·대부직(隊副職)을 받아 정7품까지 오를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의 신분적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조치였다.
정부가 칭간칭척자를 신량역천이라 하여 보충군에 입속시킨 데에는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다. 건국 이래 호적(戶籍)과 군적(軍籍)을 정비하면서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국역 자원이 대폭 증가하였다. 이에 반하여 국내외 정세는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그 결과 국가는 대규모의 역사나 특정 물자의 생산을 위하여 일반민호와 군사의 유휴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1406년(태종 6)에 폐지한 각사노비 80,000여 구(口)를 확보하여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업무에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사항이 칭간칭척자와 같은 정역호(定役戶)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중앙의 각 아문에 사령(使令)이나 잡역에 동원되던 서반(西班)의 대장·대부를 숙위(宿衛)의 임무로 환원시키고 그 공백을 칭간칭척자로 메우려는 의도도 있었다.
칭간칭척자를 보충군에 입속한 조치는 이들에 대한 양인으로서 신분 보장과 천역 부담의 철폐를 제도적으로 확인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는 칭간칭척자의 소멸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점차 칭간칭척자는 신분적 제한보다 그들이 지는 역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되었다. ‘간(干)’, ‘척(尺)’이라는 특수한 계층을 지칭하는 칭호가 점차 정역호를 가리키는 칭호가 되면서 이들 칭호도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리하여 세조대에 이르면 신분적 차별을 보이지 않는 ‘부(夫)’나 ‘군(軍)’을 사용하거나, ‘간’이라는 표현이 삭제되었다. 이에 따라 법제상 신량역천의 계층은 사라지고 단순한 수사적 의미만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담당한 역이 고역(苦役)이며 이 고역을 세전(世傳)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이는 법제상으로는 사라졌으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신량역천의 계층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참고문헌
- 유승원, 「조선초기의 ‘신량역천’계층-칭간칭척자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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