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반(文班)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에 중앙의 정무아문과 지방의 도·군·현에 편제되어 정치를 주도한 문관의 관직.

개설

조선시대의 문반(文班)은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시대 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중앙과 지방에 각각 540여·340여 직 이상의 정직(正職)과 100여 직 이상의 겸직(兼職)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당상관 중심의 국정 운영, 관제 정비, 재정 절감 등을 이유로 수시로 개변되었다. 문반직에 포함되었던 잡류(雜類)가 잡직(雜職)으로 정비되어 분리되었고, 이후 820여 정직과 150여 겸직의 경직(京職), 790여 외직(外職)으로 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이 관제가 다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간행된 1865년(고종 2)까지, 비변사 등의 치폐, 군영아문의 설치, 능(陵)·전(殿)·원(園) 등의 증설, 교수·훈도의 혁파 등에 따라 변경되면서 경직은 790여 정직과 190여 겸직으로, 외직은 450여 직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큰 변동 없이 1894년(고종 31)의 근대식 관제 개편 때까지 계승되면서 운영되었다.

문반은 크게 그 관직이 속한 관서의 소재지에 따라 경직과 외직으로 나뉘고, 다시 경직은 정직·겸직, 녹직(祿職)·무록직(無祿職), 당상직(堂上職)·당하직(堂下職)·참상직(參上職)·참하직(參下職), 직계아문직(直啓衙門職)·육조속아문직(六曹屬衙門職)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외관은 방백(方伯)·수령(守令)과 그 외의 관직으로 구분되었다. 또 문반에는 일반 문관과 종친·의빈·외척·공신이 포괄되었다. 문반은 문산계(文散階)·종친계(宗親階)·의빈계(儀賓階)를 지닌 사람에게 제수되었는데, 이에는 문과 급제자와 음서 출신 및 천거를 통해 진출한 사람 등이 망라되었다. 문반직의 지위는 그 소속 관서의 기능과 격, 근무지 등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경직이 외직보다 우월하였고, 경직 중에서는 직계아문의 관직이 육조 속아문의 관직보다 우월하였다. 또한 육조 속아문의 관직 중에서는 관각직(館閣職)이 여타 관직보다 우월하였으며, 외관은 수령이 그 외의 관직보다 지위가 높았다.

문반직 중에서도 중심이 된 것은 정치를 주도한 의정부·육조·삼사 등에 속한 관직이었다. 특히 당하관 이하는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제수되었는데, 대부분 승자·승직되면서 체직되었다. 그뿐 아니라 단기간에 당상관으로 진출하였고, 국정 운영을 주도하는 종2품 이상으로도 무난히 승진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리면서 모든 관원이 선망하는 관직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문반직은 크게 그 근무지에 따라 중앙과 지방 즉 경직과 외직으로 구분되고, 경직은 다시 관직의 지위[職秩]에 따라 당상직·당하직·참상직·참하직으로, 상근 여부에 따라 정직·겸직으로, 녹봉 지급 여부에 따라 녹직·무록직으로, 소속 관서의 지위에 따라 직계아문직·육조속아문직으로, 직사(職事) 여부에 따라 정무직(政務職)·예우직(禮遇職) 등으로 구분되었다. 외직은 목민(牧民) 여부에 따라 관찰사에 해당하는 방백 및 부윤·병사 이하의 수령과, 그 외의 관직으로 나뉘었다. 여기서 당상직은 정1품∼정3품 상(上)의 관직을, 당하직은 정3품∼종4품의 관직을, 참상직과 참하직은 각각 정5품∼종6품, 정7품∼종9품의 관직을 가리킨다. 또 직계아문직은 직계아문인 정1품∼정3품 당상아문에 속한 관직을, 육조속아문직은 육조에 속한 정3품∼종6품 아문에 소속된 관직을 말한다. 정무직에는 의정부와 육조 등의 관직이, 예우직에는 종친부·의빈부·돈녕부·중추부 등의 관직이 속하였다.

경외의 문반에는 문과·음서·천거를 거쳐 출사한 인물과, 혈연을 바탕으로 제수된 종친·부마, 외척과 그 자손,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봉군된 공신 등이 포괄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관계(官階)를 바탕으로 제수되었는데, 문반직의 경우 일반 문관과 외척은 문산계를 토대로, 종친과 부마는 별도로 운영된 종친계와 의빈계를 토대로 제수되었다. 일반 문관과 외척의 자손은 모든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이들 관직에는 정원이 있었다. 여기에 비해 의빈 등이 제수되는 관직에는 정원이 없었으며, 의빈은 종3품직, 종친은 정6품직, 공신은 종2품직이 하한(下限)이었다.

문반은 고과(考科) 및 포폄법(褒貶法)에 근거한 정기 인사인 도목정(都目政)을 비롯하여 문과와 문과중시(文科重試)·공로·특지(特旨) 등에 의하여 승직·강직·파직되었다. 고과는 관서별로 장관이 6개월마다 소속 관원의 근무 성적을 상·중·하로 평가하는 것을 말하고, 포폄법은 고과에 따라 관원을 표창하거나 문책하는 제도를 뜻한다. 당상관의 경우 정해진 임기 없이 당상관의 승진 순서인 좌목(座目)과 왕의 특별 명령인 특지(特旨)에 의해 승진하였다. 당하관 이하 경관의 경우 참상관 이상은 900일의 근무 기간을 채우고 근무 평가가 5고(考) 3상(上)인 사람이, 참하관은 450일의 임기를 채우고 3고 2상의 평가를 받은 사람이 가자(加資)되면서 체직되었다. 체직 때에 의정부·육조 낭관은 승직되었고, 그 외의 관원은 같은 품계의 관직으로 체직[平遷]되었으며, 10고 2중인 경우에는 무록관으로 체직되었고, 10고 3중 또는 5고 2중인 관원은 파직되었다. 당상 수령은 5고 1중인 경우 파직되었다. 외관은 경관과 마찬가지로 가자되었으나 임기는 달랐는데, 관찰사와 도사의 경우 360일, 수령의 경우 1,800일이었다. 다만 당상 수령이나 가족 없이 부임한 수령은 임기가 900일이었다.

문반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무반을 압도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정책을 입안하고 군사·국방을 제외한 모든 행정을 결정·집행하였다. 중앙의 정1품~정3품 당상관은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된 의정부와 육조 등 직계아문의 장관이나 차관으로서, 낭관을 지휘하면서 해당 관서의 정무 전반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렸다. 또한 왕이 임석하는 여러 회의에 참석하여 소속 관서의 업무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은 것은 물론, 각종 현안이나 조정 대소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등 국정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행하였다. 정3품 당하관 이하는 의정부와 육조 등에 속한 낭관의 경우 실무를 관장하여 해당 관서의 운영을 뒷받침하였고, 육조 속아문인 여러 시(寺·)감(監)·관(觀)·창(倉)·고(庫)·서(署)의 관원은 그 관서의 장관과 속관으로서 각각 정사를 주관하고 담당하였다. 예우 기관인 종친부·의빈부·돈녕부에 속한 관직은 담당하는 직무가 없었다. 한편 삼사(三司)로 통칭된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의 관원은 언론 활동을 통하여 왕에게 간쟁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당하관 이하의 관직을 제수할 때 그 자격을 심사[署經]하는 등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선정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의정부와 육조의 낭관 및 언론을 관장한 삼사의 관원은 재주와 식견이 뛰어난 인재 중에서 선발하였고, 대부분 단기간에 당상관 이상으로 진출하였기에 청요직으로 불리면서 모든 관원이 선망하는 관직이 되었다. 또 당상관은 숭문경무(崇文輕武) 사상 및 문반 중심의 군정 운영에 따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오위(五衛) 등의 군직을 겸대하며 군정을 지휘하였다. 외직의 경우 관찰사를 비롯한 수령 등이 지방행정을 총관하고 백성을 통치하였다. 관찰사는 왕의 위임을 받아 도내의 수령을 지휘·감독하면서 도정을 총괄하였을 뿐 아니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대하면서 군정을 총관하였다. 수령은 관내의 행정을 총관하고 절제사(節制使) 이하의 군직을 겸대하면서 군정을 수행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에는 삼정승과 판서·유수·오군영 대장 등이 군국중사(軍國重事)를 관장한 비변사의 제조(提調)를 겸대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문반직의 지위는 주로 해당 관서의 기능 및 업무, 인사 규정 등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결과 경직이 외직보다 우대를 받으면서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경직 중에서는 직계아문의 관직이 육조 속아문의 관직보다 우월하였고, 직계아문의 관직 중에서는 의정부·육조 또는 비변사·육조의 관직이 가장 우월하였고, 삼사의 관직이 다음이었다. 육조 속아문의 관직 가운데서는 성균관·예문관·승문원 등의 문한(文翰)을 관장하는 관각직이 그 외의 관직보다 지위가 높았다. 특히 조선후기의 이조 정랑 및 좌랑은 전랑(銓郞)이라 불렸는데, 후임자를 천거하고[自代制] 삼사의 당하관 이하 관원의 인사를 주관하였다[通淸權]. 그리고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삼사의 관원을 지휘하면서 의정부·육조 등의 당상관을 제약하는 등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당쟁을 촉발·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문반직은 조선 개국과 함께 중앙에 품관인 유내(流內)·무품관인 유외(流外)의 정직과 겸직을, 지방에 정직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1484년(성종 15)까지 정치 제도의 정비, 종친·공신·부마의 예우, 관원의 포폄 등과 관련되어 유외직이 혁파되고, 문반에 포함되어 있던 잡류가 잡직으로 정비되고 제외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경직·외직, 당상직·당하직·참상직·참하직, 정직·겸직, 녹직·무록직, 정무직·예우직 등으로 정립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된 뒤, 그대로 근대식 관제 개혁으로 개편되는 조선시대 말까지 계승되었다.

문반직은 1392년(태조 1)에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중앙에 정1품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좌시중(左侍中)·우시중(右侍中)과 삼사(三司) 영사(領事) 이하 610여 직의 정직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판사(判事) 이하 100여 겸직을, 지방에 2품 안렴사(按廉使)·도순문사(都巡問使) 이하 700여 직 이상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1484년(성종 15)까지, 관서의 설치·혁파·통합, 경비 절감, 군현의 승강·통합, 국방 강화, 학관·역관 제도의 정비 등과 관련되어 각급 관직이 신치·삭감·혁파되었다. 그 결과 무정수의 종친·공신·부마 제외한 중앙의 정직은 정1품 의정부(議政府) 영(領)·좌(左·)우의정(右議政)과 돈녕부(敦寧府) 영사 이하 510여 직 이상으로, 지방의 정직은 종2품 8도 관찰사(觀察使) 이하 810여 직으로 정비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그 뒤 비변사·유수부(留守府)·규장각(奎章閣)의 설치, 능관(陵官)의 대대적인 증설 등에 따라 관직이 신치·삭감·혁파되면서,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는 560여 경직과 440여 외직으로,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580여 경직과 450여 외직으로 조정되었다. 이후 『대전회통』이 간행된 1856년(고종 2)까지 다시 570여 경직과 450여 외직으로 조정되어, 큰 변동 없이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수반된 근대식 관제 개혁 때까지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문반직의 중심이 된 경관 정직은 표 1과 같다.

300px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반윤홍, 『조선시대 비변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3.
  •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 일조각, 1980.
  • 이은순, 『조선후기 당쟁사연구』, 일조각, 1988.
  •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한충희, 「조선초기 정3~정6품 청요직연구」, 『조선사연구』 13, 2004.
  • 한충희, 「조선초기 관직구조연구」, 『대구사학』 75, 2004
  • 한충희, 「조선초기 도제와 군현제 정비연구」, 『계명사학』 15, 2004.
  • 한충희, 「조선초기 경직 문관 정1~종6품직의 관직지위 - 인사제와 관력을 중심으로」, 『계명사학』 18,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