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일기(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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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비서 기구인 승정원(承政院)에서 작성한 일기.

개설

『정원일기(政院日記)』는 왕의 비서 기구로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의 일기이다. 『승정원일기』라고도 하며, 승정원의 기구 개편에 따라 『궁내부일기(宮內府日記)』, 『비서감일기(秘書監日記)』, 『비서원일기(秘書院日記)』, 『승선원일기(承宣院日記)』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승정원 소속의 정7품 관직인 주서(注書)가 일기의 편찬을 관장하였으며, 왕의 동정을 비롯해 승정원을 통해서 보고되거나 하달된 왕명 등이 기록되었다. 현재 3,045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정원일기』는 승정원의 관청 일지와 같은 성격으로, 승정원의 제도적 확립과 관련해서 작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은 1400년(정종 2) 4월에 중추부(中樞府)승지(承旨)가 승정원 승지로 개칭되면서 비롯되었고(『정종실록』 2년 4월 6일), 다음 해에 승추부(承樞府)에 합속되면서 폐지되었다가 1405년(태종 5)에 승추부가 병조로 통합되면서 혁거될 때 다시 독립 아문이 되고 대언(代言) 1직이 신치되면서 6대언 체제로 정착되었다. 이어 1433년(세종 15)에 지신사(知申事)가 도승지(都承旨), 대언이 승지로 개칭되면서 고려적인 모습을 벗고 조선적인 승정원제로 정립되었다(『세종실록』 15년 9월 22일). 따라서 승정원이 제도적으로 확립되는 세종대 이후부터는 승정원에서 일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중종실록』 35년 1월 13일). 세종대 작성된 『정원일기』는 『세종실록』 편찬의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문종실록』 2년 2월 22일).

『정원일기』는 이후 지속적으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란(戰亂)과 화재 등으로(『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인조실록』 18년 6월 19일), (『영조실록』 20년 10월 13일) 현재는 1623년(인조 1) 이후의 기록만이 남아있다.

『정원일기』의 작성은 승정원 소속의 정7품 주서가 담당하였다. 주서는 고려 이래의 당후관(堂後官)을 개칭한 것으로 승정원을 통과한 모든 공사와 문서를 기록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였다. 특히 주서는 예문관 소속의 사관(史官)과 함께 왕과 신하들이 만날 때 반드시 참석하여, 그들의 대화 내용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주서에게는 뛰어난 문장력과 속필(速筆)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대화를 모두 받아 적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왕에게 아뢸 말만 간추려 진달하면서 천천히 말을 해 주서가 다 쓰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말을 하도록 왕이 지시한 적도 있었다(『인조실록』 8년 1월 27일).

『정원일기』는 왕의 동정을 비롯해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는데, 이 중 일기의 필수 요소인 날짜나 날씨, 그리고 승지의 좌목(座目) 등은 승정원에 소속된 서리나 아전 등이 미리 작성하였다. 이를 대책(大冊)이라고 하였다. 승정원에 접수된 각 기관의 문서는 승지들이 모아 이를 전교축(傳敎軸)으로 만들고, 여기에 왕이 계하(啓下)한 내용을 서리들이 옮겨 적었다. 또한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상소나 차자 역시 의례적인 문투는 일부 생략된 채 전사(轉寫)하였다. 여기에 입시한 주서가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논의된 내용을 자신들의 기록 장부인 초책(草冊)(『중종실록』 19년 11월 1일)에 기록하였다가 이를 대책에 옮겨 기록함으로써 하루치의 ‘정원일기’가 완성되었다.

초책은 본초책(本草冊) 또는 비초(飛草), 『주서일기』, 『당후일기(堂後日記)』(『숙종실록보궐정오』 33년 3월 2일)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서지 사항

『정원일기』는 필사본으로, 현재 3,045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헌종대 기록인 2,454책과 2,465책은 누락된 상태이다. 이 밖에도 1772년(영조 48) 3월과 6월, 8월, 1776년(정조 즉위) 8월 1일부터 8월 15일, 1827년(순조 27) 7월과 1831년 5월, 1841년(헌종 7) 3월과 6월, 1845년 8월, 1846년 10월, 1847년 2월, 1857년(철종 8) 8월과 1861년 11월의 경우 기록이 누락되었다. 또한 1일이나 2일씩 누락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정원일기』는 승정원의 개편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1894년(고종 31) 6월까지는 『승정원일기』라는 명칭으로 존재하며, 1894년 7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는 『승선원일기』로, 1894년 11월부터 1895년 3월까지는 『궁내부일기』로, 1895년 4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는 『비서감일기』로, 1895년 11월부터 1905년 2월까지는 『비서원일기』로, 1905년 3월부터 1907년(순종 즉위) 10월까지는 다시『비서감일기』로, 1907년 11월부터 1910년 8월까지는 『규장각일기』로 불렸다.

『정원일기』는 세종 연간 승정원 직제가 확립되면서부터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인조대 이후부터 순종 연간까지의 기록이다. 인조대 이전의 일기는 전란이나 화재 등으로 소실되었지만 개수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정원일기』는 임진왜란 이후 4차례 개수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궁궐의 화재로 춘추관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과 『정원일기』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이에 따라 개수된 것이 1차 개수였다(『선조실록』 28년 2월 8일). 당시 개수의 대상 시기는 1567년(선조 즉위)부터 1592년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이후 『정원일기』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 1600년(선조 33) 기록에 따르면 “임진년(1592년) 한 해 동안의 일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는데, 계사년(1593년)·갑오년(1594년)·을미년(1595년) 3년간 일도 기록하지 않는 부분이 10개월이나 되고, 병신년(1596년)·정유년(1597년)·무술년(1598년)·기해년(1599년) 4년의 역사는 1년의 기록 중에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경우는 8~9개월이 되며, 적은 경우도 4~5개월 이상이 된다.”라고 하였다(『선조실록』 33년 12월 1일).

『정원일기』의 2차 개수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이후에 이루어졌고, 임진왜란 이후부터 1623년까지 약 34년간의 기록에 대한 개수가 이루어졌다. 인조대에는 1641년에 병자호란으로 유실된 47책의 개수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후 『정원일기』의 대폭적인 개수는 영조대에 진행되었다. 1744년(영조 20) 창덕궁 인정문에서 발생한 화재가 인근의 승정원까지 번져 보관되었던 『정원일기』가 대부분 소실되었다(『영조실록』 20년 10월 13일). 이에 1746년에는 『정원일기』 개수를 위한 일기청(日記廳)이 설치되어 대대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다(『영조실록』 22년 5월 16일). 이때 개수 대상 일기는 인조대부터 경종대까지로 한정하였다.

고종대에도 주서의 근무 장소인 당후(堂後)에 화재가 발생하여 일기가 소실되어 개수가 진행되었다(『고종실록』 25년 3월 8일), (『고종실록』 26년 8월 9일). 고종대에는 철종~고종대까지의 『정원일기』가 개수되었다.

구성/내용

『정원일기』에 수록된 내용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① 날짜, 간지, 날씨, ② 각 방(房) 승지의 좌목·참석 여부 명단과 주서 성명, ③ 대전·중전·대비전·왕세자전에 대한 약방의 문안 및 입진 곧 진찰 기사, ④ 각 방 승지가 각 조(曹)나 각 사(司)의 보고를 받아 왕에게 올린 계사(啓事)·계목(啓目)·첩정(牒呈)과 그에 대한 왕의 처리 내용을 담은 전교(傳敎) 및 비망기(備忘記)·교서(敎書) 등, ⑤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인사 행정 관련 내용, ⑥ 관인이나 유생의 상소 및 지방관의 장계(狀啓)와 그에 대한 왕의 비답(批答)·전유(傳諭)·하유(下諭), ⑦ 기타 왕에게 보고되는 사항들, 예컨대 사은(謝恩)·숙배(肅拜) 등, ⑧ 왕의 거둥과 관련된 일체의 행사, ⑨ 신료 접견 관련 사항들, 예컨대 경연·약방·상참(常參)·윤대(輪對)·유생 전강(儒生殿講) 등으로 정리된다. 이 밖에도 간혹 왕이 신하들을 비밀히 불러서 특정 사안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기록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4년 11월 15일).

이 가운데 ①의 내용 중 날씨는 『정원일기』의 가치를 높이는 기록이다. 조선후기 288년 동안 날씨 기록이 대부분 기록되었다. ‘맑음[晴]’이나 ‘흐림[陰]’ 등으로 기록되는 것 이외에도 때에 따라서는 ‘오전에는 비가 오고 저녁에는 맑음[朝雨夕晴]’과 같이 기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③의 문안 기록이나 ⑨에 포함된 약방의 입진 기록은 왕의 동정과 관련해서 중요한 기록이다. 왕의 건강 상태는 물론이고 상태에 따라 진맥(診脈)을 보거나 약을 처방하는 등 중요한 기록을 담고 있다.

④와 ⑥은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나 개선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주로 국정 운영에 대한 신하들의 기록을 적은 것이며, 이에 대한 왕의 지시 사항을 수록하였다. 당시 정치사의 현안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⑨는 관원들이 입시하여 왕과 논의한 내용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입진의 기록을 비롯해 대신이나 관원들이 왕에게 아뢴 내용, 이를 둘러싼 왕과 관원들의 찬반 내용 등이 주로 수록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서 국정 운영의 방향이나 하나의 정책이 수립되는 과정, 그리고 이 과정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 및 절충하는 과정 등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정원일기』는 승정원의 업무 일지지만, 승정원이 왕명의 출납을 전담하는 관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다양한 국정의 주요 사안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국정 운영에 주요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를 위해 비교적 열람이 자유로웠다(『중종실록』 2년 11월 29일). 『정원일기』는 정치적 사안이나(『성종실록』 7년 3월 10일), (『연산군일기』 7년 10월 7일) 국정 운영에서 전례(前例)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때(『성종실록』 7년 3월 11일), (『중종실록』 21년 8월 6일) 빈번히 이용되었다. 또한 왕명에 대한 착오가 있을 때 이를 확인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1월 1일). 『정원일기』는 왕의 승하 후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로도 활용되었으며(『문종실록』 2년 2월 22일), (『연산군일기』 4년 7월 21일), (『광해군일기』 1년 10월 5일), 정조대에는 규장각의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 작성의 준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5년 2월 13일).

『정원일기』는 비단 관청뿐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활용되었다. 개인적인 송사에 활용될 뿐 아니라 특정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해서 활용되었다. 이는 사관이라고도 불리는 주서가 작성하였다는 점에서 신빙성과 객관성이 다른 어느 기록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정원일기』는 또 개인의 문집이나 연보를 간행할 때도 활용되었다.

이처럼 관청이나 개인이 『정원일기』를 활용하다 보니 일기의 내용이 항간에 전파되었다. 이에 정조는 1783년(정조 7)에 긴급하게 거행할 일이 있어 전례를 상고하는 경우 이외에는 열람을 금지하도록 하였고, 만역 열람하는 경우에는 주서가 따로 책자를 만들어서 관리하고 감독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7년 7월 1일).

한편 『정원일기』는 일부분만이 개수되어 전하고 있다는 것과 일부 기록이 의도적으로 삭제된 점은 한계라 하겠다. 부분적인 개수로 인해 현재는 인조대 이후부터만 전하고 있다. 아울러 잘못된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 삭제되었으며(『영조실록』 14년 2월 14일), 정치적인 이유로 기록의 일부가 삭제되기도 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영조 말년에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생부인 사도세자와 관련된 『정원일기』의 기록을 삭제할 것을 요청하여 기록이 지워졌다(『영조실록』 52년 2월 4일), (『정조실록』 13년 10월 7일). 이 밖에도 주서나 사관들의 담합에 의해 왕과 신하들의 대화 내용을 일부 왜곡하는 일도 있었다(『순조실록』 6년 1월 6일). 이 같은 한계가 있지만 『정원일기』는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 자료 편찬을 위한 1차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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