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윤(兪命胤)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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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유명윤 |
한글표제 | 유명윤 |
한자표제 | 兪命胤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홍연주 |
자 | 윤보(胤甫)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29년(인조 7) 5월 18일 |
사망 | 1669년(현종 10) 1월 17일 |
본관 | 기계(杞溪)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유대경(兪大儆) |
조부 | 유양증(兪養曾) |
부 | 유계(兪棨) |
모_외조 | 전주 이씨(全州李氏) : 이산악(李山岳)의 딸 |
형제 | (동생)유명필(兪命弼), 유명흥(兪命興) |
처_장인 | 남원 윤씨(南原尹氏) : 윤형성(尹衡聖)의 딸 →(자녀)1남 1녀 |
자녀 | (1자)유상기(兪相基) (1녀)송무석(宋茂錫)의 처 |
저술문집 | 『가례원류(家禮源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명윤(兪命胤) |
총론
[1629년(인조 7)~1669년(현종 10) = 41세]. 조선 중기 효종(孝宗)~현종(顯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이조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윤보(胤甫)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유계(兪棨)이며,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산악(李山岳)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유양증(兪養曾)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수안군수(遂安郡守)유대경(兪大儆)이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4년(효종 5)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하였으며, 1657년(효종 8)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방목(榜目)』] 1659년(효종 10)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가 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10년 3월 15일]
1660년(현종 1) 사관(史官)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 유계가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었으므로 상피법(相避法 : 일정 범위 내의 친척이 같은 관청 혹은 통속 관계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게 한 법)의 저촉을 받지 않기 위하여 유계를 체직시켜야 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년 2월 27일] 그러나 곧 자식 때문에 아비의 직을 바꾼다면 인륜 질서가 문란해진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유명윤(兪命胤)의 사관 임명이 취소되었다.[『현종실록』현종 1년 2월 29일] 이어 승정원(承政院)가주서(假注書)를 거쳐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 및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었으며, 이러는 가운데 편수관으로서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현종실록』현종 1년 4월 19일, 현종 1년 5월 21일, 현종 1년 9월 9일] 그리고 이듬해인 1661년(현종 2)에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죄인 심문과 처벌 과정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가 얼마 후에 다시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현종실록』현종 2년 5월 6일, 현종 2년 8월 19일, 현종 2년 9월 28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2년 9월 6일]
1666(현종 7) 4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되었고, 이듬해인 1667년(현종 8)에는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현종실록』현종 7년 5월 23일, 현종 8년 4월 8일] 그리고 같은 해 6월 홍천현감(洪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병환과 사망으로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져서, 결국 1669년(현종 10) 1월 17일 향년 41세로 세상을 떠났다.[『현종개수실록』현종 10년 2월 6일] 유명윤이 죽은 후에, 그의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가 병든 남편을 위하여 손가락 세 개를 짤라 피를 먹여 나흘 더 살게 하였다면서, 조정에서는 은전으로 정표(旌表)를 내렸다.[『현종실록』현종 10년 4월 4일]
한편 유명윤은 아버지 유계와 윤선거(尹宣擧)가 『가례(家禮)』의 해설서로 편찬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 작업에 일부 참여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숙종 41년 11월 10일]
성품과 일화
유명윤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젊어서 성격이 방일(放逸)하여 구속되기를 싫어하고 기개가 호방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울부짖으며 차가운데서 빌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어 잠시나마 연명시켰고, 거상(居喪)하는 예에 정성을 다하고 근신하여 한 가지도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자진하여 외딴 고을로 관직을 나아갈 것을 청했다. 만년에 더욱 성리학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주자대전(朱子大典)』을 애독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80 「이조정랑유군묘갈명(吏曹正郞兪君墓碣銘)」]
묘소와 후손
유명윤의 묘소가 어디에 위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의 내용은 전한다.
부인 남원 윤씨는 윤형성(尹衡聖)의 딸이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경릉참봉(敬陵參奉)유상기(兪相基)이고, 딸은 송무석(宋茂錫)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재유고(明齋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