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역(安民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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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의 도로망인 자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남도 창원시 안민동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전기 세종대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재편하면서 경상도에 자여도(自如道)를 설치하고 역승(驛丞)을 파견했는데, 안민역(安民驛)은 그 과정에서 자여도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세조대에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자여도의 속역으로 확립되어,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 연간에 전국의 역도-역로 조직을 정비하면서 자여도를 설치했는데, 이때 경상도 창원 지역에 신설된 안민역은 근주역(近珠驛)·성법역(省法驛)·적항역(赤項驛) 등과 함께 자여도 소속이 되었다. 안민역은 웅천(熊川)의 보평역(報平驛)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부산포나 일본으로 가는 관리들은 안민역에서 하룻밤을 묵고 보평역을 지나 제포(薺浦)에서 배를 탔다고 한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창원 편과 『창원대도호부읍지(昌原大都護府邑誌)』에 따르면, 안민역에는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5필 등 총 7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98명, 역노(驛奴) 8명, 역비(驛婢) 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57년(세조 3) 1월에 하삼도(下三道)의 도순찰사박강(朴薑)과 부사(副使)구치관(具致寬) 등이 여러 진(鎭)과 포(浦)를 순찰한 이후의 논의에 따라 창원의 사현북면(私峴北面)과 안민역(安民驛) 등이 분할되어 웅천현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월 16일). 또 같은 해 4월에는 경상도의 역 간 거리가 고르지 못한 것을 역의 이속(移屬)을 통해 조정함으로써 역민들이 원활하게 교통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는데, 이때 안민역은 보평역으로 이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4월 28일). 그 뒤 1510년(중종 5)에는 역승을 혁파하고 찰방(察訪)을 둠에 따라 자여도역승도 찰방으로 승격되었다. 그 과정에서 안민역은 자여도찰방이 관할하는 15개 역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안민역은 조선후기까지 자여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안민역의 위치는 『여지도서』·『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창원대도호부읍지』·『영남읍지(嶺南邑誌)』 등에 모두 창원도호부 관아 남쪽 27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쪽으로 김해 성법역과 30리, 서쪽으로 진해 상령역(常令驛)과 90리, 남쪽으로 웅천 보평역과 33리, 북쪽으로 근주역과 45리 떨어져 있었다. 안민역이 위치했던 창원대도호부에는 안민역을 비롯해 자여역(自如驛)·신풍역(新豊驛)·근주역 등 총 4개의 역이 있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경상남도 창원시 안민동이다. 안민동은 안민역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한편 1510년(중종 5)에는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김석철(金錫哲)이 안민역에 진을 치고 경상좌〮우도방어사와 함께 왜적을 협공하기도 했다(『중종실록』 5년 4월 21일).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창원대도호부읍지(昌原大都護府邑誌)』
  • 『영남읍지(嶺南邑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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