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평역(報平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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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자여도에 속한 역.

개설

보평역(報平驛)은 조선 건국 후 전국적으로 역도(驛道)와 역로 조직이 정비되면서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었던 경상도 지역에 신설된 역으로 추정된다. 신설 당시의 명칭은 웅신신역(熊神新驛)으로, 이후 세종 연간에 보평역으로 개칭되어 세조대 자여도(自如道)에 소속되었다.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후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었던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역들이 신설되는데, 보평역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 경상도 지역에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역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기존에 부족했던 역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보평역의 명칭이 보이지 않으며, 대신 보평역의 전신인 웅신신역(熊神新驛)의 역명이 나타난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웅천 조에 따르면, 보평역에는 역리(驛吏) 30명, 역비(驛婢) 3명과, 중마 2필, 복마 5필 등 7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보평역은 웅천현 관아의 남문 밖에 위치하였는데, 북쪽의 창원 안민역 및 동쪽의 김해 적항역과 각각 30리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한편 1509년(중종 4)에는 보평역을 혁파하는 문제가 논의되기도 하였다. 보평역이 제포(薺浦) 북쪽 3리 지점에 위치한 까닭에 역인(驛人)과 왜인의 교류가 많았는데, 그에 따라 기밀이 누설되는 폐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물품 무역을 할 때 왜인과 보평역의 역인이 결탁하는 일이 잦은 것도 혁파를 주장하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기밀을 누설하는 것은 엄격히 금하되 역은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보평역은 존속하게 되었다(『중종실록』 4년 4월 2일).

변천

보평역이 신설되었을 때의 명칭은 웅신신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조에서 웅신신역으로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가 세종 14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웅신신역, 즉 보평역이 신설된 시기는 세종 14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웅신신역이 보평역으로 개칭된 시기는 대략 1437년(세종 19)에서 1438년(세종 20) 사이로 추정된다. 이는 이 기간 동안 경상도 지역에 신설된 역들의 개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1457년(세조 3)에 창원의 안민역을 웅천의 보평역에 통합하였으며(『세조실록』 3년 4월 28일), 1457년(세조 3)의 역승 폐지에 따른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게 되면서 각 역도에 소속된 역의 수가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역로가 쇠퇴하는 폐단이 발생함에 따라, 1462년(세조 8)에 대대적인 역로 개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평역은 경상도의 역도인 자여도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도 별다른 변화 없이 자여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5,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