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驛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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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도로의 원근이나 중요도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관역사나 정역별감, 역승 또는 찰방 등 외관의 지휘 아래 운영한 도로 체계.

개설

역도(驛道)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관역사나 정역별감, 역승, 찰방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한 역로를 말한다. 조선의 역도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6과(科)-22역도 체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4군 6진을 개척하고, 경기도 및 하삼도 지역의 역을 신설·이설 및 통합하면서 태종, 세종, 세조대에 걸쳐 대대적으로 역도를 개편하였다. 그 결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할 무렵에는 41역도-543속역 체제가 확립되었다. 조선 왕조는 이처럼 전국적인 역참 체계를 조직하고, 각 역도에 역승(驛丞)찰방(察訪)을 파견해 왕명의 전달, 역마의 입마(立馬), 사신의 접대, 통행인의 규찰, 역민의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통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의 역도는 고려시대의 역도 체계를 바탕으로 부분적인 개편을 거치면서 점차 확립되었다. 1413년(태종 13) 9월에 서북면의 생양관(生陽館)에서 의순관(義順館)까지 역승을 임명하고, 금교참(金郊站)에서 경천참(敬天站)까지는 관승(館丞)을 임명하여, 그들의 관리 아래 역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는 경기도의 역도인 마산도(馬山道)를 청파도(靑坡道), 금곡도(金谷道)를 중림도(重林道), 풍해도칠참(豊海道七站)을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로 개편하고 그와 동시에 청교도(靑郊道)를 증설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역도 개편의 시초인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414년(태종 14)에는 평구도(平丘道)를 복설하였으며, 1415년(태종 15) 4월에는 풍해도구참(豊海道九站)에 관승 1명을 더 두어 금교경천도관승(金郊敬天道館丞)이라 하였다.

그 후 1423년(세종5) 7월에는 경상도의 황산도(黃山道)·성현도(省峴道)를 설치하고 역승을 파견하였으며 태조 이후 세종대에 걸쳐 동북 지방의 개척에 따라 새로운 역을 설치함으로써 함길도의 역로 조직도 새롭게 편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안도의 관로는 관승 대신 찰방을 차견하고, 역도를 평안도(平安道) 생양관로찰방(生陽館路察訪)과 평안도(平安道) 신안관로찰방(新安館路察訪)으로 이원화시키고 경기도는 영서역(迎曙驛)에서 산예역(狻猊驛)까지를 경기우도정역찰방(京畿右道程驛察訪)으로, 양재역(良才驛)에서 무극역(無極驛)까지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京畿左道忠淸道程驛察訪)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동북 지방의 함길도는 6진 개척을 계기로 태조 이후 신설한 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역도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1421년(세종3) 6월 함길도관찰사 신상(申商)의 요구에 의하여 기존의 고산도(高山道)와 시리도(施利道)를 고산도(高山道)·시리도( 施利道)·주천도(酒泉道)라는 3개의 역도로 편성되었다. 그 후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6진 개척이 거의 완성된 1440년(세종22) 2월에는 의정부의 주장으로 안변의 고산참(高山站)에서 함흥의 덕산참(德山站)까지를 고산도(高山道), 홍원의 신은참(新恩站)에서 길주의 고참(古站)까지를 거산도(居山道), 경성의 명원참(明原站)에서 경원의 마유참(馬乳站)까지를 수성도(輸城道)라 하여 역도 조직을 개편하고 찰방의 주관 아래 운영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3도 찰방 체제는 다시 5도 역승 체제로 바뀌었다. 1445년(세종 27) 3월에는 고산도(高山道: 안변 고산참~고원 통달참), 화원도(和原道: 영흥 화원참~홍원 평포참), 거산도(居山道: 북청 오천참~단천 마곡참), 명원도(明原道: 길주 영동참~경성 수성참), 연기도(燕基道: 온성 무녕참~부령 회수참)의 5개 역도로 일시 개편되었다가 다시 1446년(세종28) 12월에는 고산도(高山道: 안변 고산참~함흥 덕산참), 거산도(居山道: 홍원 함원참~갑산단천 마곡참), 명원도(明原道: 길주 영동참~경성 수성참), 풍산도(豊山道: 회령 석보참~오진 부거참)의 4개 역도 체제로 바뀌었다.

이처럼 세종대에는 역로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44역도-537속역 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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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세종대의 역도 체계는 그 뒤 세조대에 이르러 또다시 대폭 개편되었다. 세조 연간의 개편은 1457년(세조 3)과 1460년(세조 6), 그리고 1462년(세조 8) 세 차례에 걸쳐 단행되었다. 먼저 1457년 9월에는 도성 인근에 위치한 경기도의 여러 역과 강원도 및 충청도의 일부 역을 합속하여 경기좌도·경기우도·경기충청좌도·경기충청우도·경기충청도·경기강원도 등 6개 역도로 나누고, 역승을 폐지하고 그 대신 각각 정역찰방(程驛察訪)을 두었다. 그밖에 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의 경우 일부 역과 역도를 다음 <표2>와 같이 기존의 역도에 통합하는 방향으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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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역도 체계는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1460년 2월의 2차 개편과 1462년 8월의 3차 개편을 거쳐 다음 <표3>과 같이 확립되었다. 다만 2차와 3차 개편은 단순히 역을 이속(移屬)하고 역도를 통합한 것이 아니라, 사객과 찰방이 먼 거리를 왕래하는 데 따른 인마(人馬)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각 역과 역도의 거리를 조정하여 재편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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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2년에 개편된 역도 체계는 이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음 <표4>와 같이 『경국대전』 체제의 41역도-543속역 체계로 확립되었다. 이로써 마침내 조선시대 전기의 전국적인 역로망이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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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조선시대 역도 체계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의 역도 체계를 재편한 점, 둘째로는 4군 6진 등의 영토 확장에 따라 역참과 합배를 신설하고, 4군 지역에는 대동도(大同道)·어천도(魚川道)를, 6진 지역에는 고산도(高山道)·거산도(居山道)·수성도(輸城道)를 신설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셋째로는 개성 도원역(桃源驛)에서 철원 용담역(龍潭驛)에 이르는 도원도(桃源道)를 신설한 점, 넷째로는 고려시대의 22역도-525속역 체계를 41역도-543속역으로 개편하여 지역별로 역도를 분할하고 속역을 신설한 점을 들 수 있다. 마지막 다섯째로는 중요 교통로를 따라 대로·중로·소로로 역도를 구분하고, 파발로나 봉수로와의 보완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통·군사·통신을 통합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 전기의 41역도-543속역 체계는 일부 속역의 치폐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갑오개혁으로 역참제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통 제도가 발달하기 전까지, 역도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 사회를 지탱하는 교통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호남역지(湖南驛誌)』
  • 『영남역지(嶺南驛誌)』
  • 『관서역지(關西驛誌)』
  • 『관북역사례(關北驛事例)』
  • 정요근, 『고려, 조선초의 驛路網과 驛制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유선호, 「조선초기의 驛路와 直路」, 『역사교육』70, 1999.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교통로의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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