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역(新豊驛)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신풍역 |
한글표제 | 신풍역 |
한자표제 | 新豊驛 |
상위어 | 자여도(自如道) |
관련어 | 속역(屬驛), 소촌도(召村道), 역리(驛吏), 역노비(驛奴婢),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조병로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풍역(新豊驛) |
조선시대 경상도의 역도 중 하나인 자여도에 속한 역.
개설
신풍역(新豊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자여도(自如道)의 속역으로 최초로 등장하였다. 창원에서 김해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역으로, 세종 연간에 자여도에 소속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잠시 소촌도(召村道)로 이속되었으나, 1460년(세조 8)에 다시 자여도의 속역이 되어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신풍역은 위치상 고려시대 금주도의 속역에 해당하지만, 자여역·근주역·덕산역·적항역 등과 달리 고려시대에는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풍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자여도역승 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자여역(自如驛)·근주역(近珠驛)·안민역(安民驛)·창인역(昌仁驛)·영포역(靈浦驛)·김해신역(金海新驛)·대산신역(大山新驛)·남역(南驛)·금곡역(金谷驛)·덕산역(德山驛)·성법역(省法驛)·적항역(赤項驛)·웅신신역(熊神新驛) 등 13개 역과 더불어 자여도에 소속되었다. 그 뒤 1457년에 소촌도로 이속되었으나, 3년 뒤인 1460년에 다시 자여도의 속역이 되어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 이후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풍역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창원도호부 역원 조에 따르면, 도호부 동쪽 4리 지점이었다. 그에 비해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창원 역원 조에는 창원부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쪽의 김해 대산역, 서쪽의 근주역, 남쪽의 안민역, 북쪽의 영산 온정역(溫井驛)과 연결되었으며, 자여역·성법역과 더불어 창원과 김해를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 역의 경우 각 역도의 본역을 제외한 나머지 속역의 구체적인 조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역무를 담당한 역리(驛吏), 역노비 등을 포함한 역속(驛屬)과 역마의 수는 알려져 있는데, 신풍역의 경우 『여지도서』 경상도 창원 역원 조에 따르면 역리 97명, 역비 1명과,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 9필 등 총 12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자여도역지(自如道驛誌)』에는 역마의 수가 상등마 1필, 중등마 2필, 하등마 7필 등 총 10필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신풍역은 『고려사(高麗史)』에 관련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설치되지 않았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자여도의 속역으로 편성된 것으로 미루어 조선전기 세종대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대인 1457년에는 소촌도에 소속되었으나, 1460년에 다시 자여도로 이속되었다. 그 뒤 성종 연간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자여역·근주역·창인역·영포역·금곡역·남역·성법역·적항역·안민역·대산역(大山驛)·보평역(報平驛)·파수역(巴水驛)·춘곡역(春谷驛)·덕산역(德山驛)과 더불어 자여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커다란 변화 없이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영남읍지(嶺南邑誌)』
- 『자여도역지(自如道驛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