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촌도(召村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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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도 진주를 중심으로 진해·함안·의령·고성·하동·거제·남해 등지에 설치된 역을 관할한 역도.

개설

소촌도(召村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중 하나로, 고려시대 산남도(山南道)의 속역들을 계승하여 편성되었다.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역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설치되었으며, 22개 속역을 관할하였다. 그 뒤 세조 때에는 16개 속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성종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반포하는 과정에서 소촌역(召村驛)을 비롯해 16개 속역으로 확립되었다. 소촌도는 진주를 중심으로 곤양-남해에 이르는 역로와 진주-사천-고성-거제에 이르는 역로, 그리고 진주에서 의령과 진해를 연결하는 역로로 구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역은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진상품 등 공공 물자의 운송, 사신의 영송(迎送)과 접대, 왕래인의 규찰과 역마에 관한 일 등을 담당하게 하기 위해 설립한 육상 교통 기관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41역도-543속역 체제를 확립하여 육상 교통망을 구축했는데, 소촌도는 그 과정에서 경상도 지역에 설치된 역도였다.

소촌도는 고려시대의 역도 중 하나인 산남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설치되어 22개 속역을 관할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자여도와 소촌도를 소촌도로 통합하였으며, 이후 소촌도는 소촌역·부다역·영창역·평거역·덕신역·양포역·관율역·동계역·송도역·배둔역·오양역·지남역·구허역(丘墟驛)·문리역(文利驛)·완사역(完沙驛)·상령역(常令驛) 등 16개 속역을 관할하였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성종대에 『경국대전』을 반포하면서, 진주의 소촌역을 포함해 상령역·평거역·부다역·지남역·배둔역·송도역·구허역·관율역·문화역·영창역·동계역·양포역·완사역·오양역·덕신역 등 16개 속역으로 확립되었다. 소촌도는 진주를 중심으로 곤양-남해에 이르는 역로와 진주-사천-고성-거제에 이르는 역로, 그리고 진주에서 의령과 진해를 연결하는 중심 역로로써 기능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에는 각 역도에 관승(館丞)이나 역승(驛丞)을 파견해 업무를 관할하게 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찰방(察訪)을 임명하여 역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역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각 역에는 역리(驛吏)와 역노비를 포함한 다양한 역민을 편성하였다. 또 운송 수단으로서 역마를 배정하였으며, 역전(驛田)을 지급해 역의 소요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다음 <표1>은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집계한, 소촌도 속역의 역속 및 역마 배속 현황이다. 기록이 누락된 사천 지역을 제외하면, 소촌도에는 역리 3,298명, 역노(驛奴) 1,517명, 역비(驛婢) 632명이 배정되어 역무를 맡아보았으며, 역마는 221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특히 소촌도의 본역인 소촌역의 경우 역리 1,714명, 역노 869명, 역비 390명 등 총 2,973명의 역속과 11필의 역마가 배치되었다. 또한 역마의 경우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소촌도우지(召村道郵誌)」에 따르면, 대마 6필, 중마 30필, 복마 113필 등 총 149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또 다른 『영남읍지』「소촌도우지」에는 대마 6필, 중마 70필, 복마 73필 등 총 149필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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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리와 역노비의 경우 모두 다 입역(立役)을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에는 요역(徭役) 및 노동의 상품화에 따라 남을 대신 보내 공역(公役)을 치르게 하는 고립제(雇立制)가 발달하였는데, 역역(驛役)의 경우에도 실제로 역에서 노역을 수행하는 선상입역(選上立役)과 신공전(身貢錢)을 납부하는 신공납부로 분화되었다. 특히 역리는 행정 업무를 보는 아전으로 근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른 읍에 흩어져 살면서[散居] 납공(納貢)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각 역에는 역무를 수행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많은 역사 건물이 건립되었다.『영남읍지』 「소촌도우지」 공해 조에 따르면, 소촌역에는 찰방이 집무하는 동헌인 열청헌(閱淸軒)을 비롯해 역리들이 행정 업무를 보는 인이청, 통인이 근무하는 통인청, 사령이 근무하는 사령청, 마부가 근무하는 마부청, 문루인 운금루(雲錦樓)가 건립되어 있었다. 그밖에 환곡을 보관하는 진휼고(賑恤庫), 아록미태(衙祿米太)를 저장하는 호고(戶庫), 진유(眞油)·청밀(淸蜜) 등을 보관하는 관청고(官廳庫), 본역의 위토(位土)에서 징수한 것으로 잡물을 구입하는 우편고(便郵庫), 복호결(復戶結)에서 징수한 비용으로 역마 급료를 담당하는 대동고(大同庫), 둔답(屯畓)이나 보역답(補役畓)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역마 구입비에 쓰는 둔답고(屯畓庫) 등이 있었다.

변천

소촌도는 고려시대의 산남도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산남도에는 진주의 평거역(平居驛)·정수역(正樹驛)·조촌역(竈村驛)·소남역(小男驛)과 사주(泗州)의 관율역(灌栗驛), 하동의 율원역(栗原驛)·황포역(橫浦驛), 악양(岳陽)의 평사역(平沙驛), 진해의 상령역(常寧驛), 곤명(昆明)의 완사역(浣沙驛), 반성(班城)의 부다역(富多驛), 의령의 지남역(知男驛), 고성의 춘원역(春原驛)·배돈역(排頓驛)·망린역(望隣驛), 남해의 덕신역(德新驛), 거제의 오양역(烏壤驛)이 속해 있었다. 이 역들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 연간에 대부분 소촌도에 소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촌역은 소촌역(召村驛)으로, 소남역은 소남역(召南驛), 정수역은 정수역(正守驛), 상령역은 상령역(常令驛), 지남역은 지남역(指南驛), 배돈역은 배둔역(背屯驛), 관율역은 관율역(官栗驛)으로 개칭되었다. 또 진주의 진주신역(晋州新驛)·말문신역(末文新驛)·금량신역(金良新驛)·영선신역(永善新驛)과 함안의 함안신역(咸安新驛), 그리고 사천의 사천신역(泗川新驛) 등이 신설되어 소촌도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신역들은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대부분 폐지되었고, 그 대신 진주의 문화역(文和驛)·영창역(永昌驛)과 고성의 송도역(松道驛)·구허역(駈墟驛), 사천의 동계역(東溪驛), 곤양의 양포역(良浦驛)이 새로 설치되었다.

소촌도의 속역은 다음 <표2>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안간역(安磵驛)·파수역(巴水驛)·신흥역(新興驛)의 신설, 진주 평사역의 하동 이설, 고성 춘원역의 폐지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였다. 이후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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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영남읍지(嶺南邑誌)』 「소촌도우지(召村道郵誌)」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井上和枝, 「19세기 호적대장에서 보는 역촌사람들의 존재양식-진주 召村里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4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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