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래(朴宗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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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46년(영조 22)~1831년(순조 31) = 86]. 조선 후기 영조~순조 때 활동한 문신. 병조 판서를 지냈다. 자는 희보(喜甫)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준원(朴駿源)이고,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정지식(鄭志式)의 딸이다.

영조~순조 시대 활동

1770년(영조 46)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후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를 역임하였고, 1777년(정조 1)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다. 1790년(정조 14)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794년(정조 18) 8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김종수(金鍾秀) 사건의 처리가 소홀하였다고 하여 9월에 파직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1798년(정조 22) 4월에 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체직되었다.

1801년(순조 1) 4월에 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7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그 해 9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부세(賦稅)의 개정에 노력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1803년(순조 3) 9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0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04년(순조 4) 2월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이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고, 8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며, 11월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805년(순조 5) 1월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는데, 10월 또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06년(순조 6) 1월 상순에 정경(正卿)으로 발탁되었는데, 같은 달 하순에 형조 판서가 되고, 4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8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9월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10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807년(순조 7) 7월에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09년(순조 9) 2월에 한성부 판윤이 되고, 그 해 7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같은 달에 곧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9월에 동지사 겸 사은정사(冬至使兼謝恩正使)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다. 그 해 같은 달에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가 되었으며, 10월에 동지 겸 사은정사로 부사(副使)김노경(金魯敬)과 서장관(書狀官)이영순(李永純)과 함께 청(淸)나라 수도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1810년(순조 10) 3월에 돌아왔다. 그 해 5월에 공조 판서가 되고, 6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9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가 같은 달 하순에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12월 공조판서가 되었다. 1811년(순조 11) 2월 특진관(特進官)을 겸하였고, 4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5월 병조판서가 되었고, 9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10월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

1812년(순조 12) 1월 의금부 판사가 되고, 6월 이조 판서가 되었고, 7월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같은 달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다. 그 해 8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고, 10월에 원접사(遠接使)로 차출되었으며, 11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13년(순조 13) 1월 돈령부(敦寧府) 판사(判事)가 되고, 2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4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그 해 5월 예조 판서가 되고, 8월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며, 10월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 1814년(순조 14) 3월 세자시강원 좌부빈객이 되었고, 5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으며, 6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 1815년(순조 15) 1월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소학(小學)』의 가치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해 9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16년(순조 16) 1월 이조 판서가 되고, 2월 형조 판서가 되었고, 3월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윤6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가 같은 윤6월 하순에 세자시강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

1817년(순조 17) 2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7월 중순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7월 하순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관찰사로 있을 때는 그 해 10월 의릉(義陵)의 수개(修改)를 감동(監董)한 공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되고, 다음 해인 1818년(순조 18) 9월 안릉(安陵)의 수축 공사를 감독한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819년(순조 19) 4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1820년(순조 20) 9월 공조 판서가 되었다. 1821년(순조 21) 3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가 되었고, 6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 1822년(순조 22) 12월 세자시강원 좌빈객(左賓客)이 되었다. 1826년(순조 26) 1월 돈령부 판사가 되었다. 1830년(순조 30) 2월 이 해가 중추부 판사박종래의 회방(回榜)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자식이나 조카 가운데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도록 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그 해 8월 좌빈객이 되고, 그 뒤 중추부 판사가 되었는데, 1831년(순조 31) 1월 16일 중추부 판사로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시호와 가족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첫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시적(李時迪)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고치성(高致聖)의 딸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