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남(朴宗男)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미상~1601년(선조 34)]. 조선 중기 선조 때에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병조 참의(參議)이다. 자는 자윤(子胤)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박호(朴虎)이고, 어머니는 경원박씨(慶源朴氏)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식년(式年) 무과(武科) 갑과(甲科) 2등으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중시(重試)에 다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기장현감(機張縣監),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어머니의 3년상이 끝난 후, 형조 좌랑(佐郞)을 거쳐 형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고, 호조 정랑(正朗)으로 자리를 옮겼다. 1583년(선조 16)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를 토벌할 때, 세운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였다. 1584년(선조 17)에 비변사(備邊司)에서 그가 문무(文武)를 겸전하였으므로, 북방을 진압할 수 있다고 추천하여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고, 이어서 길주부사(吉州府使), 온성부사(穩城府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전라도 조방장(全羅道助防將)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춘천부 방어사(春川府防禦使)로 임명되어 왜적의 북진을 막았다. 이 때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서 분조(分朝)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를 호행장(護行將)에 임명하였다. 그 뒤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 참의(參議),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가, 이 해 8월에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으나 관찰사(觀察使)와의 의견 충돌로 파직되었다. 뒤에 이순신(李舜臣)에 의해 주사 조방장(舟師助防將)이 되어 연해(沿海) 5읍(邑)의 군병(軍兵)을 장악하였고, 그 뒤 한산(閑山)·장문(場門)·영등(永登)·견내량(見乃梁) 등의 해전에 참여하여 모두 승전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참소를 받아 하옥(下獄)되는 바람에 그의 공로도 드러나지 않고 말았다. 후에 상주목사(尙州牧使)·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11월에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다. 그 후 대사헌(大司憲)홍여순(洪汝淳)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다. 1601년(선조 34) 6월 10일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종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날 때 아름다운 기질을 타고나 기개가 호탕하고 아울러 문재(文才)가 있었는가 하면, 필력(筆力)도 굳건하였다. 그리고 충효(忠孝)와 청렴(淸廉)도 천성으로 타고 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는 슬퍼하고 사모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길 적에는 그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먼 변방에 있게 되면 항상 선영의 생각이 간절하여 명절 때마다 저녁 내내 슬퍼하였다. 여러 차례 주(州)와 부(府)를 맡았으나 기와 한 장도 논 한 두락도 늘어나지 않았다. 육경(六經)을 모두 꿰뚫고 자사(子史)에 두루 통달하여 문장이 뛰어났다. 글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사양하지 않았고, 병풍이나 족자를 써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큰 잔으로 술 한 잔을 마신 다음에 써주었다. 주량(酒量)이 매우 컸으나 자제할 줄을 알았는가 하면, 앞서지 않고 뒤로 물러나 군자(君子)의 기풍이 있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마산(馬山)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부인 이씨(李氏)는 군수(郡守)이세준(李世俊)의 딸인데,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풍천부사(豊川府使)인 박영신(朴榮臣)이고, 2자는 박영민(朴榮民)이다. 1녀는 최사순(崔士恂)의 처 가 되었고, 2녀는 서몽열(徐夢說)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무과방목(武科榜目)』병자식년(丙子式年)
  • 『난중잡록(亂中雜錄)』
  • 『서애집(西厓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