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규(朴信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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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1년(인조 9)~1687년(숙종 13) = 57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형조 판서를 지냈다. 자는 봉경(奉卿)이고, 호는 죽촌(竹村)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참판(參判)박진원(朴震元)이고, 조모 기씨(奇氏)는 기경인(奇敬仁)의 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박계영(朴啓榮)이며,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유명남(柳命男)의 딸이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경술(經術)과 문학(文學)에 힘을 기울여, 1652년(효종 3)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1660년(현종 1) 식년시(式年試文)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그 해 가주서(假主書)가 되었으며, 1662년(현종 3) 사과(司果)가 되었다. 그 해 10월 시사(試射)가 있었는데, 그가 활쏘기 시험에서 으뜸을 차지하여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그는 그 뒤 1670년(현종 11) 전주 판관(全州判官)을 지낼 때 선정을 베풀어 임기가 끝난 뒤 백성들의 유임 상소로 재임되기도 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4년(숙종 즉위) 12월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1675년(숙종 1) 5월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고, 그 해 같은 달인 5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며칠 뒤 광주부윤(光州府尹)이 되었다. 1676년(숙종 2) 1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678년(숙종 4) 10월에 승지(承旨)가 되었고, 1679년(숙종 5) 5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680년(숙종 6) 7월에 형조 판서로 특진되었다. 1681년(숙종 7) 1월에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그 해 3월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가 그 해 4월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그 해 5월에 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 그는 같은 해 9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그가 이때 아들 박성의(朴性義)가 소두(疏頭)가 되었는데, 그것이 죄가 되어 아버지인 박신규는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좌천되었었다. 이듬해인 1682년(숙종 8) 7월에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1683년(숙종 9)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가 되었고, 1684년(숙종 10) 5월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 1685년(숙종 11) 2월에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5월 초순에 의금부 판사(判事)가 되었다. 그 해 5월 중순에 호조 판서가 되었고 10월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해 11월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686년(숙종 12) 8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687년(숙종 13) 2월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4월 6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57세이다.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690년(숙종 16) 9월에, 그가 조정(朝廷)에서 벼슬하며 청백(淸白) 하였으므로 포증(褒贈)되었고, 1695년(숙종 21) 7월에 청백리(淸白吏)에 피선(被選) 되었다.

성품과 일화

그는 성질이 거칠고 목강(木强)하나, 관직(官職)에 있을 적에는 아주 청렴하고 엄격하게 법을 지키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것으로써 간구(干求)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 중추부 판사이상진(李尙眞)은 숙종께 아뢰기를, “박신규는 관직에 있을 적에 아주 청렴 결백하였으며 지조가 굳고 확실합니다. 만약에 그의 단점을 논하더라도 그것은 고집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시호와 후손

시호는 청숙(淸肅)이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황수(黃䢫)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낳았다. 1남은 박성의(朴性義)이고, 2남은 박명의(朴明義)이다. 3남은 박행의(朴行義)인데, 숙부 박진규(朴鎭圭)에게 입양되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