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돈부(朴敦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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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4년(선조 17)~1647년(인조 25) = 6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이자 학자.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다. 자는 무회(无悔)이고, 호는 창주(滄洲)이다. 본관은 무안(務安)이며, 주거지는 경상도 영해(寧海)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첨정(僉正)박응발(朴應發)이며,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이은보(李殷輔)의 딸이다. 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조효원(趙孝元)의 딸이다. 외삼촌 이함(李涵)에게 수학하였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606년(선조 39) 23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곧바로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고, 이어 광해군의 난정(亂政)이 전개되면서 십여 년 동안 진취를 단념하였다.

1624년(인조 2)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가 되었다가 이듬해 학록(學錄)이 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1629년(인조 7) 박사(博士)가 되고, 그 뒤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이어 예조 좌랑(佐郞)·호조 좌랑·병조 좌랑,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을 역임하였다. 1634년(인조 12) 진주판관(晉州判官)으로 나갔다. 당시 진주는 일이 많아 다른 고을에 비해 다스리기 벅찬 고을로 손꼽혔으나, 그가 부임한지 두어 달에 경내를 크게 정화시켰다. 또 둔전(屯田)·공납(貢納) 등에 따른 고질적인 민폐(民弊)들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모두 시정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높은 칭송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달려갔다가 강화가 성립됨에 따라 어가(御駕)를 모시고 환도하여 다시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어 직강(直講)·장령(掌令)·호군(護軍)·사예(司藝)를 거쳐 1644년(인조 22)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나갔다.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가 권신 홍무적(洪茂績)의 탄핵을 받자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경상도 영해(寧海)로 돌아와 죽림(竹林) 속에 서당을 짓고 학문탐구로 여생을 지내다가 1647년(인조 25)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이다. 저서로는 『창주문집(滄洲文集)』 3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돈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의지가 굳고 기개가 높았다. 1637년(인조 15)부터 1644년(인조 22)의 8년 사이에 장령을 여섯 번 역임하였는데, 그때 마다 대의(大義) 앞에서는 어떠한 권신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또 청렴하여 지방관을 지내고 돌아올 적이면 사사로이 쓰던 집기까지도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책 상자만을 챙겼다. 문장에 있어서도 수식을 숭상하지 않고 온건한 문체로 써서 일가를 이루었으며, 한때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과 종유(從遊)하며 경학과 예학도 많은 연구를 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