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형(孟世衡)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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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맹세형 |
한글표제 | 맹세형 |
한자표제 | 孟世衡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효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여평(汝平) |
호 | 하곡(霞谷) · 만은(晩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88년(선조21) |
사망 | 1656년(효종7) 7월 22일 |
본관 | 신창(新昌) |
주거지 | 충청도 온양(溫陽) 금곡촌(金谷村) |
묘소소재지 | 충청도 천안(天安) 광덕산(廣德山) 지금동(支金洞) |
증조부 | 맹익선(孟翼善) |
조부 | 맹유백(孟惟白) |
부 | 맹희(孟喜) |
모_외조 | 양주조씨(楊州趙氏): 조눌(趙訥)의 딸 |
처_장인 | 해주최씨(海州崔氏): 최준(崔濬)의 딸 |
자녀 | (1자)맹윤서(孟胤瑞) (2자)맹주서(孟冑瑞) (1녀)권연(權衍)의 처 (2녀)이민(李敏)의 처 (3녀)이면(李葂)의 처 (4녀)강세린(姜世麟)의 처 (5녀)허집(許緝)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맹세형(孟世衡) |
총론
[1588년(선조21)~1656년(효종7) = 69세]. 조선 후기 인조~효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여평(汝平), 호는 하곡(霞谷)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세거지는 충청도 온양(溫陽) 금곡촌(金谷村)이다. 아버지는 승지(承旨)맹희(孟喜)이고, 어머니 양주조씨(楊州趙氏)는 조눌(趙訥)의 딸이다. 세종 때 좌의정맹사성(孟思誠)의 9대손이고,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좌윤(左尹)여유길(呂裕吉), 장령(掌令)조익(趙翊), 참판(參判)이명준(李命俊)에게 글을 배우다가, 나중에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3년(인조1)에 열린 정시(庭試)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국정(國政)을 개혁하는 초기에 실시하였기에 응시하는 자가 거의 1만여 명이 넘었는데, 맹세형은 문과(文科)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박사(博士)를 거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또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맹세형을 특별히 양재찰방(良才察訪)에 임명하여, 임금 일행이 한강을 건너 피난갈 수 있도록 하였다. 1626년(인조4)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예조 정랑으로 옮겨서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이어 종묘서(宗廟署) 영(令)에 임명되어, 관향사(管餉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나갔다. 1627년(인조5)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호조 정랑으로 옮겼는데, 진휼사(賑恤使)의 종사관으로 나갔다. 1629년(인조7)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나갔다가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 제용감(濟用監)정(正)이 되었다. 1636년(인조14)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갔는데, 오랑캐가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금오성(金烏城)을 수축하고, 철저히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 모든 고을의 읍성(邑城)이 거의 함락되었으나, 오직 선산의 산성(山城)만은 함락되지 않았다. 난리가 끝나자, 맹세형은 ‘시무(時務) 10조(條)’를 올려, 나라에서 무력 대비를 철저히 하고, 척화파(斥和派)의 신하들을 기용하고, 군사들의 사기(士氣)를 진작시킬 것 등을 건의하였다. 그 뒤에 상의원(尙衣院) 정을 거쳐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나갔다
효종 초에 성균관에 들어가서 직강(直講)과 사예(司藝)로 승진하였고, 여러 시(寺)의 정을 역임하였는데, 그 사이에 내직으로 성균관의 사유(師儒)와 통례원 통례(通禮)를 지냈고, 외직으로 정주목사(定州牧使) ·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 · 안동부사(安東府使) 등을 지냈다.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봉상시(奉常寺) 정에 임명되었는데, 1656년(효종7) 7월 22일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9세였다.
탁월한 실무 행정
그는 남이 하는 대로 따라서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일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였던 결과이다. 군사적으로 내란과 호란 등의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실무 행정을 맡아서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준비하여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맹세형이 갑자기 추천되어 양재찰방(良才察訪)에 임명되었다. 반란군을 피하여 임금이 탄 수레와 호종하는 신하들이 한강을 건너서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는데, 그가 사전에 주사대장(舟師大將)과 함께 미리 계획을 세워서 배를 연결하여 부교(浮橋)를 만들고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래서 임금 일행이 배다리를 건너갈 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물건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채 무사히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병자호란> 직전에 장흥부사로 나갔는데, 그때 맹세형은 “지금 오랑캐들이 비록 시기가 좋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지만, 끝내 반드시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것이다.” 하고, 장흥 고을의 갑옷을 수선하고 군량미를 저축하여 위급한 때를 대비하였다. 1636년(인조14) 선산부사로 나갔는데, 당시 청나라가 아침저녁으로 맹약을 변경시키고 우리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이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맹세형은 선산 고을의 군사를 정비하고 금오성을 수축하여 결사적으로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온 모든 고을의 읍성(邑城)은 거의 함락되었으나, 오직 선산(善山)의 금오산성만은 함락되지 않았다.
아울러 경제적으로 식량을 원활히 공급하여 전후의 식량난을 극복하고, 흉년에 기민(饑民)을 구휼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가의 비용을 절약하여 조세를 경감시켜서,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1624년(인조2) 관향사의 종사관으로 나갔는데, 당시는 난리를 겪은 뒤였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식량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었다. 맹세형이 수급 계획을 수립하여 원활하게 식량을 공급하니, 공사 간에 모두 혜택을 보게 되었다. 1628년(인조6) 호조 정랑으로 옮겨 진휼사의 종사관으로 나갔는데, 흉년으로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자 호조에 저축된 곡식을 풀어서 기민(饑民)을 구제하였다. 효종 초에 울산부사로 나갔는데, 그는 아전들에게 엄명하기를, “백성들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먼저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 하고, 최대한 관가의 비용을 아끼고 줄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고(府庫)가 조금 넉넉해지자, 백성들에게 그만큼 조세를 감면해주었다.
그는 군사적 · 경제적으로 탁월한 실무 행정을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에서도 남보다 뛰어났다. 1629년(인조7) 금산군수로 나갔는데, 경상도 암행어사가 경상도의 여러 고을 중에서 금산군수맹세형의 치적이 가장 으뜸이라고 보고하니, 인조가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다시 호조 정랑에 임명하였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깨끗하였는데,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시정(寺正)맹세형에게 지어준 「오언고시(五言古詩)」를 보면, “내가 맹 시정을 사랑하는데[吾愛孟寺正], 청아한 지조는 깨끗하고 굳세었다[雅操淸且勁].”라고 하였다.(『청음집(淸陰集)』 권8)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권문(權門)에 출입을 삼가고 스스로 본분을 지켰으며, 집안에 있어서도 행동이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어린 아이였을 때 물고기 낚시를 좋아하여 공부는 안하고 물가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하루는 물고기를 낚아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머니가 호되게 꾸짖기를, “네가 과부의 자식이라, 학업을 폐기하고 이런 짓을 하는구나.” 하고, 울면서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자, 그도 울먹이면서 어머니에게 다시는 낚시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때부터 굳게 결심하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여러 선생을 찾아다니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을 부지런히 익혔다. 명망이 있는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에 문원공(文元公)김장생을 찾아가서 그 문하에 수학하여, 마침내 학문으로 대성하였다. 평생 홀로 된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는데, 관가의 일이 없을 때에는 일찍이 하루도 어머니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반드시 판여(板輿: 수레 가마)로써 어머니를 모시고 장수(長壽)를 비는 술잔을 올려,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다.
어려서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 항상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문하(門下)에 나아갔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하루도 빠지지 않으니, 스승 조익(趙翊)이 그 근면성을 극구 칭찬하였다. 한편, 스승 이명준이 귀양을 가자, 사람들이 연루될까봐 두려워하여 피하였으나, 그는 혼자 천리 길을 달려가서 스승을 보살폈다. 또 스승 김장생이 돌아가자, 머리에 수질(首絰)을 쓰고 장례에 참석하였는데, 김장생의 막내아들 김반(金槃)이 송시열(宋時烈)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그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인성군(仁城君)이공(李珙: 선조의 제7왕자)과 한집안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그가 역모로 죽음을 당하였을 때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않자, 그가 그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송시열은 “이 일 때문에 그는 한번도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하고 항상 쓸모가 적은 한직에만 머물렀다.”고 안타까와 했으나, 오히려 그는 실무를 맡아서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천안(天安) 광덕산(廣德山) 지금동(支金洞)에 있는데, 차남 맹주서(孟冑瑞)의 부탁으로 우암(尤庵)송시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찰방최준(崔濬)의 딸인데, 자녀는 2남 5녀를 두었다. 차남 맹주서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3녀는 좌랑(佐郞)이면(李葂)의 처가 되었다. 맹주서의 차남 맹만택(孟萬澤)은 현종의 맏딸 명선공주(明善公主)의 부마로 간택되었으나, 납징(納徵) 후 혼례를 치르기 전에 공주가 죽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백사집(白沙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청음집(淸陰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해사록(海槎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