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행(陵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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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능행 |
한글표제 | 능행 |
한자표제 | 陵幸 |
상위어 | 거동(擧動), 행차(行次), 행행(行幸) |
하위어 | 능행반차도(陵幸班次圖), 소가(小駕) |
관련어 | 능침(陵寢), 수궁대장(守宮大將), 원행(園行), 유도대신(留都大臣), 유도삼대장(留都三大將), 유영대장(留營大將), 유주대장(留駐大將), 유진대장(留陣大將), 정리사(整理使), 지송(祗送), 지영(祗迎), 행궁(行宮), 행재소(行在所) |
분야 | 왕실/왕실의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시행시기 | 능제(陵祭) |
시행장소 | 왕릉 또는 왕비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능행(陵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7월 17일, 『태조실록』 1년 7월 28일, 『태조실록』 1년 8월 8일, 『태종실록』 9년 5월 26일 |
왕이 왕릉 또는 왕비릉에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기 위해 행행하던 일.
개설
한국사에서 왕의 능행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며 그것은 고려에 계승되었다. 고려시대 왕의 능행은 오례(五禮) 중에서도 길례(吉禮)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국가의례의 하나로 시행되었다. 예컨대 『고려사(高麗史)』「지(志)」에는 왕의 능행에 대하여 “왕이 능에 참배하기 위해 출발하기 하루 전에 태묘에서 아뢰기를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며, 담당 관사는 미리 참배할 능과 능실(陵室) 안을 정결하게 소제하여 정숙하게 하고, 상사국(尙舍局)은 능의 근처에 행궁을 마련하고 평사시의 의식처럼 왕의 자리를 깔도록 한다.”는 규정이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오례와 관련된 왕의 행행이 더욱 자세히 정비되었다. 예컨대 오례와 관련된 조선시대 왕의 행행은 오례의 중요성에 따라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의 세 가지 의장(儀仗)으로 구분되었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禮)』에 의하면 왕은 조칙을 맞이할 때, 종묘와 사직에 제사할 때 대가 의장을 사용하였다. 이외에 문소전(文昭殿), 선농단(先農壇), 문선왕에 제사할 때 그리고 사단(射壇)에서 활쏘기 할 때, 무과전시를 거행할 때는 법가의장을 사용하였다. 반면 능행, 활쏘기 관람, 기타 대궐 밖 행행 때에는 소가의장이 사용되었는데, 소가의장이 사용된 능행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례 중 길례에 포함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 중에서 능행에 관련된 조항은 ‘배릉의(拜陵儀)’와 ‘사시급속절삭망향제릉의(四時及俗節朔望享諸陵儀)’ 2개인데, 이 중에서 왕의 능행에 관련된 것은 배릉의였다. 배릉의는 조선후기의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 ‘행릉의(幸陵儀)’로 바뀌는데, 이는 조선후기 들어 능행이 의례적으로 완전하게 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연원 및 변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태조 1) 7월 17일에 즉위하였는데(『태조실록』 1년 7월 17일), 그로부터 11일 후인 7월 28일에 4대 조상을 왕과 왕비로 추숭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구체적으로 고조(高祖)와 고조비는 목왕(穆王)과 효비(孝妃)로, 증조(曾祖)와 증조비는 익왕(翼王)과 정비(貞妃)로, 조(祖)와 조비는 도왕(度王)과 경비(敬妃)로, 고(考)와 고비는 환왕(桓王)과 의비(懿妃)로 추봉하였다. 이어서 8월에는 4대 조상의 무덤을 능으로 높여 환왕과 의비의 무덤을 정릉(定陵)과 화릉(和陵)으로, 도왕과 경비의 무덤을 의릉(義陵)과 순릉(純陵)으로, 익왕과 정비의 무덤을 지릉(智陵)과 숙릉(淑陵)으로, 목왕과 효비의 무덤을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으로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8일). 이들 4대 왕과 왕비의 능에는 각각 능지기와 권무(權務) 2인 및 수릉호를 두었으며 재궁(齋宮)을 세웠다.
그러나 추존 4대 왕의 무덤은 모두 함경도에 소재하여 태조는 직접 능행을 하지 못하고 대신 신하를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왕의 능행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조성된 태종대부터 거행될 수 있었다. 다만 태종에 의한 최초의 건원릉 능행은 제사가 아니라 태조의 재궁을 모시고 간 것으로 일반적인 능행과는 차이가 있었다. 태종이 건원릉에 발인이 아닌 의례적인 능행을 한 것은 1409년(태종 9) 5월 건원릉에서 직접 별제를 거행한 때였다. 당시 태종은 별제를 지낸 후 능실을 둘러보고 비문을 살펴보았다(『태종실록』 9년 5월 26일). 이후 왕의 능행은 의례적인 행사가 되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조선왕조가 유교 의례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능이 도성 가까이에 소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컨대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에 소재했고, 그 외의 능들도 경기도 지역에 소재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단종의 능이 강원도 영월에 소재했는데, 이는 단종이 영월에 귀양 간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저간의 사정에서 말미암는다. 따라서 추존 4대왕과 단종의 능을 제외한다면, 조선시대의 왕릉은 전부 경기도 지역에 소재하였고, 이 결과 능행이 수월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능행은 소가(小駕)라고 하는 거가(車駕)를 이용해 거행되었다. 이 같은 능행의 모습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크게 변했다. 먼저 제후 체제가 황제 체제로 바뀌면서 거가에 수반되는 각종 의장물이 황제의 의장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새로이 마차, 전차, 열차와 자동차 등 근대 교통체계가 도입됨으로써 행행의 방식과 규모 역시 근대 교통체계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시대 능행이 결정되면 우선 정리사(整理使), 유도대신(留都大臣), 수궁대장(守宮大將), 유영대장(留營大將) 및 왕의 시위 병사들을 지휘할 대장과 수행할 인원 및 도성에 남을 인원이 정해졌다. 정리사는 보통 행행에 관련된 경비 관련 업무를 총괄하였다.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영대장은 궁궐과 수도방위를 책임졌다. 왕을 호위하는 대장은 행행 시 왕의 호위 병사들을 통솔하였다. 정리사,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영대장, 호위대장(護衛大將) 등은 보통 왕과 대신의 협의에 하여 선정되었다. 아울러 육조(六曹)에서는 각각의 업무 내용에 따라 행차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시대 왕은 능행 중에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기도 하고 능 소재지의 민원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왕의 능행과 관련한 격쟁(擊錚), 집단 상소 또는 과거시험 등이 자주 거행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한예전(大韓禮典)』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의 행차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신명호, 「조선후기 국왕 行幸時 국정운영체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