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사(整理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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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 화성(華城)에 원행(園幸)하면서 행궁 및 일정을 담당하기 위해 만든 정리소(整理所)의 우두머리.

개설

정조는 화성에 현륭원(顯隆園)을 설치한 뒤 매년 정기적인 원행을 시작하였다. 정조의 정기적인 원행은 기존 왕들은 거행하지 않은 새로운 행행이었다. 원래 왕의 행행에 사용되는 경비는 경상비(經常費)가 아니었다. 다만 정조 이전의 왕들은 현륭원과 같은 곳을 조성한 뒤 정기적으로 행행을 하지 않았으므로 국정에 큰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정조가 세운 현륭원은 사친(私親)의 묘소이면서 기존 의례 체제에 없던 것이었으므로 재정 이용에 대한 명분이 약했다. 정조는 이런 취약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리소를 설치하고 호조 판서를 정리사(整理使)로 삼아 원행 비용을 별도로 관리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원행에 따른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면서 경상 비용을 축내지 않으려는 뜻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정리사를 두었다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정리(整理)란 이름의 기원은 탁지(度支), 즉 호조에서 시작되었다. 호조에서 왕의 행차가 경숙(經宿)하는 행궁에 미리 가서 모든 행전(行殿)의 방롱(房櫳), 완점(筦簟), 장악(帳幄), 궤안(几案) 등과 관련한 것들을 정돈하고 수리해서 새롭게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정조실록』 20년 2월 11일). 정리사는 수행 관원들의 노자와 군마(軍馬) 및 여도(輿徒)의 식량, 사료에 이르기까지 담당하였다(『정조실록』 19년 윤2월 13일). 그런데 정조대에 세운 정리소의 정리사 이전에도 동일한 이름의 유사한 기능을 지닌 정리사가 있었다. 현종대와 숙종대에 온양온천에 행행할 때 사전에 고위 관원을 파견하여 행궁과 도로 등 온행과 관련한 일을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 예컨대 1665년(현종 6)의 온행에서는 형조 판서김좌명(金佐明)을 정리사로 임명하여 온양에 보내서 행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외에도 광해군대와 인조대에도 정리사의 명칭이 보인다. 이때의 정리사는 주사청(舟師廳)의 배를 관리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14년 5월 14일). 1619년(광해군 11) 주사청에는 용주(龍舟) 3척, 복선(卜船) 64척이 있었다(『광해군일기』 11년 9월 13일). 주사청의 정리사는 변란이 발생했을 때 왕을 피신시킬 수 있는 배를 관리한 것으로 보이므로 정조대의 정리사와는 분명히 다르다.

정조대의 정리사와 유사한 사례가 다른 왕 대에도 존재했으며, 정조대 정리사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정조대와 같이 정리소를 설치하여 상시적으로 행행의 준비와 과정을 관리하게 하지는 않았다. 또한 정조대의 정리사는 화성 원행을 위해 마련한 것이므로 기존 사료에 나타난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정리사는 궁궐 내에 있었는데 화성을 건설하면서 그 직무가 확대되었다. 정조는 화성 원행에서 어주(御廚)에 공급하는 비용에서부터 백관, 군병, 아전, 하인의 노자와 호궤(犒饋)하는 비용에 이르기까지 총 10여만 냥을 호조에서 담당하지 않고 장용영 내영(內營)에서 관장하게 하고 정리소라 명하였다. 이외에 정리소에서는 다리를 수리하거나 길을 닦는 등의 일과 거탄(炬炭), 시초(柴草)의 비용과 금고(金鼓), 기치(旗幟), 화구(火具) 등도 마련하였다(『정조실록』 20년 2월 11일).

1793년(정조 17)에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꾸면서 수원부사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1명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화성의 정리사가 있던 곳은 외정리소(外整理所)라고 하였다(『정조실록』 20년 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 유수를 두면서 정리사를 겸하게 한 것은 행궁의 수리를 위임하고 성지(城池)의 수선을 책임지게 할 목적이었다. 또한 화성의 외정리소 재정을 위해서 화성행궁정리수성곡(華城行宮整理修城穀)을 설치하였다. 화성과 행궁을 완성한 뒤의 유지, 원행의 접대, 과거 시험에 대한 비용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도였다(『정조실록』 19년 4월 15일).

그런데 정조대 화성 원행에서 정리사가 담당하던 직무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1790년(정조 14)에는 원행 때에 정리사가 가던 것을 없애고, 경기도관찰사와 기랑(騎郞)이 도로와 교량을 살피고, 사복시의 기군(旗軍)과 세마(洗馬)는 부자내(部字內)에 한해서만 척후를 세우고 복병(伏兵)을 없애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4년 2월 2일).

변천

1800년(순조 즉위) 순조 즉위 이후 장용영을 해체하면서 행궁정리사와 정리소를 폐지하였다(『순조실록』 2년 2월 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온행등록(溫幸謄錄)』
  • 『온행일기(溫宮日記)』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훈국등록(訓局謄錄)』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陵幸의 意義」, 『한국학보』 88, 일지사, 1997.
  •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南漢山城 행차」, 『조선시대사학보』 60, 2012.
  • 柳承宙, 「南漢山城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韓國史硏究』 120, 2003.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 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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