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定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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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부친인 환조이자춘의 능.

개설

환조(桓祖), 즉 태조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은 도조(度祖)이춘(李椿)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함경도 영흥에 해당하는 쌍성(雙城) 지방에서 원나라의 천호(千戶)로 있다가, 1355년(고려 공민왕 4)에 고려에 귀부하여 소부윤(少府尹)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고려의 밀직부사(密直副使)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협력하여 총관부를 함락,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 데 일조했다. 이 공으로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이 되었고, 개경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이후 1360년(고려 공민왕 9) 병으로 승하하자, 함흥부 동쪽 7리쯤 되는 신평부(信平部) 귀주동(歸州洞)에 장사하였다(『태조실록』 2년 9월 18일). 조선 개국 후에 태조는 아버지를 환조로 추존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환조의 비 최씨(崔氏)는 증 판문하영흥백(贈判門下永興伯)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로 의비(懿妃)에 봉해졌으며, 능호는 화릉(和陵)이다.

조성 경위

태조는 1392년(태조 1) 조선을 개국한 뒤 아들 이방원(李芳遠)을 동북면에 보내, 4대 조상의 능실에 제사를 지내고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게 하였다. 이때 각 능의 능호를 정해 올렸는데, 아버지 이자춘의 능은 ‘정릉’이라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8일). 또 두 달 뒤에 이방원을 다시 함길도에 보내, 능마다 능지기, 권무(權務)와 수릉호(守陵戶) 몇 호(戶)를 두고 재궁(齋宮)을 건축하게 하였다(『태조실록』 1년 10월 28일).

정릉의 비문은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정총(鄭摠)이 지었으며,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표석을 세우게 했다(『태조실록』 2년 1월 25일)(『태조실록』 2년 9월 18일).

조성 상황

정릉과 화릉은 같은 영역에 있는데, 정릉이 뒤에 있고, 화릉이 앞에 있다. 앞뒤로 나란히 있는 두 능의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조선시대 왕릉은 같은 영역에 쌍분이나 상하로 봉분을 조성한 경우 능호를 별도로 쓰지 않았는데 태조의 4대조는 덕릉(德陵)과 안릉(安陵), 정릉과 화릉과 같이 같은 영역에 있는 경우에도 각각 능호를 썼다. 정릉과 화릉을 합쳐 정화릉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1424년(세종 6) 예조(禮曹)에서 여러 산릉의 호칭을 합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여 각각 따로 불렀다(『세종실록』 6년 4월 21일).

태종대에 세운 비석이 있었으며 세종 대에 비각을 세우고, 능지기와 권무 각 1명씩을 두었다[『세종실록』지리지 함흥부].

변천

태종대에 대사헌(大司憲) 이원(李原)이 정릉과 화릉에 계체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수축하기를 건의하였다. 이에 계체석과 함께 양석(羊石)과 석인을 세우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6년 1월 21일).

세종대에는 비각을 세웠는데 비석이 기울어진 좁은 땅에 있으므로 비각을 세우기가 어려워 평지에 옮겨 세웠다(『세종실록』 3년 1월 23일).

영조대에는 정릉과 화릉의 비각을 다시 세웠으며, 고종대에는 함경도에 위치한 8개 능의 비각을 영건하고 표석을 세웠다(『고종실록』 43년 1월 19일).

관련 사항

태조의 명으로 함길도에 다녀온 이방원은 여러 능의 산세를 그린 화본(畫本)을 바쳤다(『태조실록』 1년 10월 28일). 그 그림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태조의 4대조 능과 관련 사적지를 그린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이 소장되어 있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능을 그린 것은 6폭이다. 그림에는 목조(穆祖)와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덕안릉(德安陵), 익조(翼祖)의 지릉(智陵), 정숙왕후(貞淑王后)의 숙릉(淑陵), 도조(度祖)의 의릉(義陵),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순릉(純陵), 환조(桓祖)와 의혜왕후(懿惠王后)의 정화릉(定和陵)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민속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