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릉(智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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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증조부인 익조 이행리(李行里)의 능.

개설

이행리는 덕원, 알동, 안변 등지에 거주하였는데, 사후에 안변에 안장되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뒤 그를 익조로 추존하였으며, 그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호를 지릉이라 하였다.

조성 경위

이행리는 목조이안사(李安社)의 넷째 아들이다. 함경도 덕원에서 태어났으나, 원나라로 귀화한 목조를 따라 두만강 건너편 알동에 거주하였다. 이안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지위를 이어받아 천호(千戶)에 봉해졌지만, 토착 세력의 위협으로 인해 적도(赤島)를 거쳐 다시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하였다.

이행리의 첫 번째 부인은 손씨이고, 손씨의 사후 두 번째로 맞은 부인이 나중에 정숙왕후(貞淑王后)로 추봉되는 최씨이다. 최씨가 등주의 호장(戶長)최기열(崔基烈)의 딸인 까닭에 이행리는 이후 등주 인근에 거처하였으며, 사후에 안변부의 서곡현 봉룡역 북동에 안장되었다. 태조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자신의 4대조를 왕으로 추존하고 8월에 그들의 능에 제사를 지내면서 능호를 올렸는데, 이때 이행리는 익조로 추존되고 그의 무덤은 지릉으로 추봉되었다.

조성 상황

1392년 10월에는 지릉의 관리를 맡아볼 능지기와 권무(權務) 2명, 수호군 5호(戶)를 두었으며, 재궁을 건축하였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지릉에는 혼유석 1개, 장명등 1개,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등의 상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정자각과 수라청, 홍살문 등이 건립되어 있었고, 홍살문 밖에는 전사청과 제기고, 안향청, 재실 등의 부속 건물과 표석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지릉의 정자각에 익조의 위판을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6년(세종 8)에 지릉의 위판을 철거하고, 정자각의 남쪽과 북쪽 벽을 평소에는 장자(障子)로 막아 두었다가 제사 때 틔워 놓고 제사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능지기와는 별도로 승려로 하여금 능을 수호하게 하였다. 지릉에 승려를 두는 관례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다가 1726년(영조 2)에 폐지되었다.

변천

지릉은 여러 번 화재를 당하였다. 성종대에는 지릉을 수호하는 승려 홍수가 비리로 인해 쫓겨난 뒤 그곳 참봉(參奉)을 해치려고 지릉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뒤 1581년(선조 14), 1624년(인조 2), 1630년(인조 8)에도 능에 화재가 나서 왕이 변복(變服)하고 애통해하며 자신을 경계하였다. 1732년(영조 8)에 정자각을 중수하였으며, 고종대에는 함경도 지역의 왕릉들을 보수하면서 지릉도 함께 수리하였다.

관련 사항

1445년(세종 27)에 함길도 덕원군 백성들이 올린 상소에는, 덕원에 거처하던 익조가 사후에 그곳 적전사(赤田社)에 장사되었다가 나중에 안변으로 이장되었다는 주장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한편, 익조 정비(貞妃)의 능인 숙릉(淑陵)은 함경남도 문천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지릉정자각개건의궤(智陵丁字閣改建儀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