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대신(留都大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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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유도대신 |
한글표제 | 유도대신 |
한자표제 | 留都大臣 |
관련어 | 거둥[擧動], 군영(軍營), 군영대장(軍營大將), 궁궐(宮闕), 궁성(宮城), 능행(陵幸), 동가(動駕), 부원군(府院君), 수가(隨駕), 수궁대장(守宮大將), 수궁장(守宮將), 숙위(宿衛), 순행(巡幸), 시위(侍衛), 온행(溫幸), 왕성(王城), 유도대장(留都大將), 정승(政丞), 행행(行幸)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이왕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도대신(留都大臣) |
왕이 행행 등을 이유로 도성을 비워야 할 때 궁궐의 사무를 임시적으로 총괄하던 지위.
개설
유도대신(留都大臣)은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왕이 궁궐과 도성을 벗어나 교외로 이동하는 경우에 임시로 도성의 치안과 경비를 담당하던 문신(文臣) 관료이다. 특히 시위병이 왕의 행행을 따라가기 때문에 궁궐 내부를 지키는 일이 소홀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따라, 기강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유도대신을 두었다고도 한다. 전쟁 시에는 유도대신이 왕을 대신하여 도성 내 백성을 위무하고 도성의 방비를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유도대신은 왕이 도성을 벗어나 교외에서 숙박할 경우, 임시로 도성의 경비를 총괄하는 지위로 자리 잡았다. 반면 왕이 도성을 벗어나지 않는 경거둥(京擧動)의 경우에는 유도대신을 두지 않았다.
담당 직무
유도대신은 영의정을 비롯한 정승 반열에 있는 고위 관료나 부원군(府院君) 지위에 있는 왕실의 인척이 담당하였다. 예컨대 1626년(인조 4) 5월에 인조가 친어머니인 계운궁(啓運宮)의 발인에 행행하여 유도대신이 필요해졌다. 영의정이원익(李元翼)은 병고(病告) 중이었고, 좌의정윤방(尹昉)은 왕을 따라가며, 우의정신흠(申欽)도 왕과 함께 왕릉에 가게 되어 결국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이귀(李貴)가 대궐을 지키는 유도대신에 임명되었다.
유도대신은 유도대장, 수궁대장 등과 함께 왕이 자리를 비운 궁궐과 도성의 업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처리하였다. 이때 유도대장과 수궁대장은 유도대신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변천
유도대신이 왕의 행행 시 궁궐을 숙위하는 것은 고종대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군제의 개편과 경운궁 설치에 따른 법궁(法宮)의 변화에 따라 유도대신은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금위영거동등록(禁衛營擧動謄錄)』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온행 연구」, 『국사관논총』 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도성내 행행의 추세와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행행시 궁궐의 숙위와 유도군 연구」, 『군사』 62,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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