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궁(法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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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법궁 |
한글표제 | 법궁 |
한자표제 | 法宮 |
대역어 | 정궁(正宮) |
상위어 | 궁궐(宮闕) |
관련어 | 경덕궁(敬德宮), 경복궁(景福宮), 경운궁(慶運宮), 경희궁(慶熙宮), 동궐(東闕), 북궐(北闕), 서궐(西闕), 왕궁(王宮), 이궁(離宮), 창덕궁(昌德宮) |
분야 | 왕실/왕실건축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강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법궁(法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년 7월 23일, 『단종실록』 1년 9월 25일, 『중종실록』 12년 7월 28일, 『태조실록』 3년 10월 28일 |
왕이 정규적으로 임어(臨御)하는 도성 내의 궁궐들 중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
개설
조선왕조의 궁궐은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으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23일). 법궁은 왕이 거처하는 공식적인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가리키고, 이궁은 부득이한 상황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거처를 옮길 목적으로 지어진 궁궐을 말한다. 법궁은 이궁보다 전각들의 구성이나 배열의 격식이 높고 제반 구성 요소들이 좀 더 엄격하게 구비되었다.
내용 및 특징
왕이 어느 궁궐에 들어가 사는 것을 임어(臨御)라 하고, 기거하는 궁궐을 옮겨 가는 것을 이어(移御)라 하며, 다시 원래의 궁궐로 돌아오는 것을 환어(還御)라 한다. 왕이 임어하는 공식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이라고 한다. 법궁은 왕실의 생활 기거 공간일 뿐만 아니라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고, 외교사절을 맞는 등 공식 활동을 하는 제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왕이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법궁 하나만 있어서는 곤란했다. 화재나 전염병이 발생하거나 궁궐에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을 때, 혹은 피서 등의 국왕의 판단에 따라 궁궐을 옮기고자 할 때, 상당한 기간을 머물며 생활할 또 다른 궁궐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국왕이 이어할 목적으로 지은 궁궐을 법궁에 대해서 이궁(離宮)이라 하였다.
법궁에 관한 인식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453년(단종 1) 9월 25일 기사에, 이예장(李禮長)이 경복궁 내의 불당을 옮겨 세우기를 청하면서 허후(許詡)가 말한 법궁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허후는 경복궁이 조선 왕조 창건 당시 도읍의 명당(明堂)을 살펴서 이룬 것이라 하였다. 태종이 창덕궁에 거처하기도 했지만 큰일이 있으면 모두 경복궁에서 행하였던 것은, 경복궁이 근본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복궁은 만세(萬世)의 법궁이기 때문에 세종 때 경복궁에 간의대(簡儀臺)를 세웠고, 원묘(原廟)를 두었으며, 백료(百僚)의 모든 사(司)를 갖추었다고 했다(『단종실록』 1년 9월 25일).
1517년(중종 12)의 기사에서도 경복궁의 법궁됨에 대해 언급하였다. 당시 한충(韓忠) 등이 중종에게 법궁인 경복궁으로 이어할 것을 언급하면서, 경복궁은 전좌(殿坐)와 실우(室宇)의 제도를 구비하였으며, 대비전(大妃殿) 및 동궁(東宮)을 따로 갖춘 법궁이라고 하였다(『중종실록』 12년 7월 28일). 선대의 왕들이 이와 같이 후손을 위해 법궁을 마련해 두었는데, 후손이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법궁은 선왕이 갖추어 둔 궁궐이라는 점, 왕의 의식과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모범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보장받은 궁궐이었다.
변천
법궁과 이궁 개념은 조선초기부터 인식되었다. 태조대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 궁궐을 짓기 전에 임시로 머물던 한양부(漢陽府) 객사(客舍)를 이궁이라고 하였다(『태조실록』 3년 10월 28일). 이것은 개경의 궁궐을 염두에 둔 용례로서 이때의 이궁은 정식 궁궐이 아닌 임시 거처라는 의미밖에 없었다. 태조대 한양에 새로운 궁궐 경복궁을 짓고부터는 경복궁이 유일한 궁궐이었기 때문에 태조 연간에는 법궁이나 이궁이란 용어가 별반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양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여 새로운 궁궐의 필요성이 커지던 태종 연간부터는 법궁과 이궁이란 용어가 다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연간에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여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창건하고자 하였을 때, 법궁인 경복궁에 대하여 창덕궁을 이궁으로 인식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 없어지기까지 경복궁은 법궁, 창덕궁은 이궁으로 불렸다. 또 성종 연간에 창덕궁과 인접한 곳에 창경궁을 지으면서 창경궁도 창덕궁과 함께 이궁으로 인식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선조 말년에서 광해군 초년에 걸쳐 궁궐을 다시 지을 때 법궁인 경복궁을 버려두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중건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이 두 궁궐이 현실적인 법궁이 되었다. 광해군은 법궁, 곧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을 그치지 않고 이궁으로서 인경궁과 경덕궁(慶德宮)을 영건하는 공역을 계속하였다. 이후 인조대에는 인경궁의 부재(部材)들을 창경궁과 창덕궁을 중수(重修)하는 데 쓰기 위하여 인경궁을 헐어 없앴다. 이후 고종초까지 경덕궁이 이궁으로 활용되었다. 즉, 새로운 법궁과 이궁의 체계로 궁궐이 운영된 것이다.
고종 초년의 경복궁 중건은 이러한 법궁과 이궁 체제에 다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일이었다. 경복궁 중건은 조선초의 경복궁 창건을 잇는다는 뜻을 표방하며 이루어졌고, 경복궁은 다시 본래 가지고 있던 법궁의 위상을 되찾게 되었다. 경복궁이 법궁으로 인식되면서 창덕궁과 창경궁은 상대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궁궐, 곧 이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영조 연간에는 경덕궁에서 이름이 바뀌어 이궁으로 활용되어 왔던 경희궁이 왕궁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참고문헌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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