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릉의(拜陵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국왕이 선왕, 선후의 능에 참배하는 의식.

개설

삼국시대부터 시행되던 능행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의례에 입각하여 배릉의(拜陵儀)로 정비되었다. ‘배릉의’는 ‘배릉결정(拜陵決定)에 따른 후속조치’, ‘진설(陳設)’, ‘거가출궁(車駕出宮)’, ‘행례(行禮)’로 구성되었으며, 그 핵심은 국왕이 선왕 또는 선후의 능에 참배하는 의례였다. 이를 통해 국왕은 선왕과 선후에 대한 자신의 효심을 솔선수범해 보이고 이를 통해 조선의 유교화를 선도할 수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삼국시대부터 국왕이 선왕, 선후의 능에 참배하기 위한 능행이 있었다. 고려시대 들어 유교 예제에 입각한 왕실 의례가 정립되면서 왕의 능행은 더욱 빈번해졌다. 예컨대 『고려사(高麗史)』 「지(志)」에는 배릉의가 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왕이 능에 참배하기 위해 출발하기 하루 전에 태묘에서 아뢰기를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며, 담당 관사는 미리 참배할 능과 능실 안을 정결하게 소제하여 정숙하게 하고, 상사국(尙舍局)은 능의 근처에 행궁을 마련하고 왕의 자리 깔기를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하는데, 행궁은 모두 능소(陵所) 앞에 적당한 곳을 가려서 마련하며 능실 곁의 적당한 곳에 소차(小次)를 마련한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국왕이 능행하는 이유는 물론 능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는데, 고려시대의 능 제사는 오례(五禮) 중의 길례(吉禮)에 해당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오례」의 ‘길례’에는 배릉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능행’과 ‘배릉의’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세종실록』「오례」에서는 ‘능행’과 ‘배릉의’를 ‘길례’가 아닌 ‘흉례’에 규정했기 때문이다. 배릉의가 ‘흉례’에 규정된 이유는 이를 상장례의 일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세종실록』「오례」에서는 ‘배릉의’를 ‘산릉친행제의(山陵親行祭儀)’라는 이름으로 바꾸기까지 했는데, 이는 1422년(세종 4) 9월에 예조(禮曹)에서 보고한 배릉의를 기준으로 하였다(『세종실록』4년 9월 14일). 하지만 ‘산릉친행제’는 상장례의 일부분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삼년상 이후에도 계속해서 거행되어야 하는 의례로 간주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길례 항목에 ‘배릉의’가 별도로 규정되었다.

조선시대의 배릉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황제 의례로 격상되었다. 이처럼 한국사에서 배릉은 역사적 변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핵심은 각 시대의 주류 종교 및 국가 체제에 따라 배릉 의식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배릉의’는 ‘배릉결정에 따른 후속조치’, ‘진설’, ‘거가출궁’, ‘행례’로 구성되어 있다. ‘배릉결정에 따른 후속조치’는 말 그대로 배릉이 결정된 후 예조에서 취하는 후속 조치들이다. 만약 능의 위치가 궁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예조에서 직접 후속조치를 담당하여 거행하지만, 한 번 이상 밤을 지내야 할 거리에 있다면 2일 전에 대신을 종묘에 보내 고유(告由)하였다.

‘진설’은 왕이 출발하기 1일 전에 먼저 거행하였는데, 능을 관리하는 능사(陵司)에서는 능침의 내외를 소제하였고, 전설사(典設司)에서는 왕이 배릉의를 거행하는 동안 잠시 머물 휴식 공간인 대차(大次)와 소차(小次) 및 시신과 종친, 문무백관들이 머물 차(次)를 설치하였다. 배릉 당일에는 의식의 실무를 총괄하는 집례(執禮)가 제사 때 잔을 올리는 일을 담당하는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의 자리 및 제사에 참여하는 집사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또한 배릉 직전에 능사는 다시 한 번 능침의 내외를 소제한 후 신위를 놓을 자리인 신좌(神座), 향로(香爐), 향합(香盒), 촉(燭) 등을 설치하였다. ‘거가출궁’은 왕이 궁궐을 떠나 능으로 행차하는 절차에 관련된 의례이다.

‘행례’는 배릉에서 가장 중요한 참배의식이었다. 행사 5각(刻) 전에 제사에 쓰는 물품을 담당하는 전사관(典祀官)과 능사에서는 제물을 제기(祭器)에 담았다. 3각 전에는 배릉에 참여할 모든 관리들이 담복(淡服) 차림으로 각자의 자리에 갔다. 1각 전에는 모든 집사와 두 번째와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관과 종헌관이 제 자리로 갔다. 1각은 약 15분이다. 그 직후에 왕은 옅은 청색의 옷인 참포(黲袍) 차림을 하고 왕이 타는 수레인 여(輿)를 탄 채 대차에서 나와 신들의 통로인 신문(神門) 밖에까지 가서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손을 씻고 나온 왕은 동쪽 계단을 통해 제관(祭官)과 초헌관이 서 있는 판위(版位)로 가서 사배(四拜)를 올렸다. 왕이 사배를 올릴 때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같이 사배를 올렸다. 이어서 왕이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례를 행하고 제자리로 가면, 그 뒤를 이어 아헌관과 종헌관이 아헌례와 종헌례를 거행하였다. 삼헌 절차가 모두 끝나면 왕은 다시 사배를 올리고 소차로 되돌아갔다가 환궁하였다.

배릉 때의 축문에서 왕은 자신과 선왕의 관계에 따라 ‘효자(孝子)’, ‘효손(孝孫)’, ‘효증손(孝曾孫)’ 중에서 합당한 용어로 자기 자신을 호칭했다. 배릉 때의 술은 청주가 사용되었다. 제물은 찬탁(饌卓)과 협탁(俠卓)에 차려졌는데, 찬탁에는 20개의 제기에 중박계(中朴桂), 산자(散子), 다식(茶食), 실과(實果) 등이 담겼고, 협탁에는 12개의 제기에 떡과 탕 등이 담겼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국왕의 배릉의는 조선시대 민간의 묘제(墓祭)에 해당하였다. 기신, 명절 등에 민간에서는 묘제를 거행하였는데 그 모범이 국왕의 배릉의였다. 민간에서는 묘제를 위해 무덤 주변에 묘지기, 묘전(墓田) 등을 두었으며 이를 통해 유교문화가 농민, 노비 층에도 확산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대한예전(大韓禮典)』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의 행차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