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의(勞酒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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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친경례를 거행한 후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주연 의식.

개설

왕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을 행하는 친경례(親耕禮) 후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한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연회이다. 이런 연회는 각종 행사 후에 여러 형태로 베풀어졌지만, 노주의는 특히 친경례와 왕이 적전에서 곡식을 베는 광경을 직접 관람하는 의식인 관예(觀刈)의 부대행사만을 가리켰다. 왕비가 직접 비단 짜는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 후에 노주연을 베풀었다는 기사가 있기도 하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노주의는 왕과 백성이 함께 참여한다는 특징이 있으며, 왕은 이런 의식을 통해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연원 및 변천

노주의는 친경례와 더불어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나오는 왕의 의식이다. 이에 의하면 음력 정월에 천자가 삼공(三公), 구경(九卿), 제후, 대부를 거느리고 제적(帝籍)에 나아가 몸소 밭갈이를 한 후에 돌아와서 대침(大寢)에서 밭갈이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는데 이를 노주(勞酒)라고 하였다. 여기서 친경례는 제적이라 불리는 밭에서 거행하는 반면 노주는 궁궐의 대침, 즉 정전(正殿)에서 거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의식을 모방한 조선시대 친경례는 1475년(성종 6) 1월 25일에 처음으로 거행하였는데 노주의는 그 다음날에 있었다. 서울 동쪽 교외 전농동에 있었던 동적전(東籍田)에서 거행하는 친경례와 달리 노주의는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에서 거행하였다(『성종실록』 6년 1월 26일). 이렇게 노주는 친경례 다음날 궁궐에서 행사 참여자들을 다시 모아 술을 내려주며 그 노고를 위로하는 의식이었다.

노주의는 친경례의 부수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친경례의 시행 여부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친경례는 한 해의 농사가 잘될 것을 기원하는 기곡(祈穀)의 의미와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까지 한데 모여 태평성대를 축하하는 축제의 성격이 공존하였다. 중종대 이후 연이은 재난으로 친경례 시행의 필요성이 증대되었지만, 친경례를 시행할 때 동반되는 결채(結綵), 가요(歌謠)의 진상, 과거(科擧) 등의 행사가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노주의 역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경전에 나오는 중요한 의식으로 간주되어 친경례를 거행할 때에 다른 부대 행사와 달리 반드시 시행되었다. 그러나 광해군대 이후 친경례가 시행되지 않음에 따라 노주의도 잠시 사라졌다.

1739년(영조 15)에 영조가 친경례를 다시 거행하면서 노주의도 같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영조대의 노주의는 이전 것과 많은 점에서 차이가 났다. 1747년(영조 23) 5월 17일에 영조는 관예를 처음으로 거행하였는데 이때에 행사를 마친 후 관경대(觀耕臺)에서 노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 1753년(영조 29) 친경례부터 노주를 다음 날 궁궐에서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친경 당일 같은 장소에서 베풀었다. 관경대에서 거행한 노주의는 궁궐 노주의보다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인사인 기민(耆民)과 일반 백성들인 서인(庶人)을 위한 행사로 치러졌다.

절차 및 내용

노주의는 그 행사의 공간에 따라 인정전 노주의와 관경대 노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형태는 친경례 행사 다음 날 궁궐에서 거행하는 노주연이다. 1475년에 처음 거행한 노주의는 인정전에서 펼쳐졌다. 인정전 북벽에 어좌(御座)가 있고 어좌 앞쪽 좌우에 종친과 문무 2품 이상의 관원이 자리하였다. 그리고 계단 위에 정3품 이상의 선농제 향관(享官)들의 자리가 있고, 계단 아래 뜰에 종3품 이하의 향관이 좌우로 벌여 있었다. 기민과 서인은 뜰 남쪽의 악현(樂懸) 서쪽에 북향하여 자리하였다. 왕이 어좌에 앉으면 참여자들이 왕에게 네 번 절을 올린 후 선(膳)과 탕(湯)을 돌리고 술을 차례로 나누어주고 마셨다. 이를 모두 마치면 왕에게 다시 네 번 절을 하고 행사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1753년(영조 2) 친경한 당일 관경대에서 거행한 노주의는 보다 단순할 뿐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형식으로 거행하였다. 관경대 노주의에서는 종친과 백관들의 참여를 없애고 관경대 동서 양편에 기민과 서인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왕이 관경대에 어좌에 앉으면 기민과 서인이 차례로 절을 올리는 자리로 나아가 왕에게 네 번 절한 후 각자의 자리에 나아갔다.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자들이 술잔을 돌리면 기인과 서인이 차례로 자리에서 나아가 잔을 받아 마시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세 잔을 마시고 나면 음식상을 철거하고 기민과 서민이 다시 배위로 나아가 네 번 절하면 의식이 끝났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농경을 기반으로 하였던 조선시대에 친경례는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고 왕이 직접 쟁기를 잡아 농사일을 권장하는 세시 의례이다. 이와 결합된 노주의는 왕과 백성이 함께하는 연회를 통해 친경례의 의의를 되살릴 수 있었다. 민간에서 널리 먹는 설렁탕의 유래를 친경례의 노주의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의하면 노주 때에는 농우(農牛)를 도살할 수 없다고 하여 돼지고기로 대신하였기 때문에 설렁탕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다(『영조실록』 15년 1월 18일). 이렇게 노주는 농경을 매개로 농민과 농우가 나라로부터 크게 대접받는 의식이었다.

참고문헌

  • 민족문화추진회, 『(신편 국역)친경친잠의궤』, 한국학술정보, 2006.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친경의궤』(규장각자료총서 의궤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1.
  • 한현주, 『밭가는 영조와 누에치는 정순왕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 김지영, 「영조대 친경의식의 거행과 《親耕儀軌》」, 『한국학보』107, 일지사, 2002.
  • 이욱, 「조선시대 친경례(親耕禮)의 변천과 그 의미」, 『종교연구』34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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