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歌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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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환궁할 때 기로(耆老), 유생(儒生), 교방(敎坊)의 기녀가 길에서 올린 축하 글.

개설

조선시대에 왕이 대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나라의 원로들과 유생, 장악원 소속의 기녀가 왕의 무사 귀한을 기뻐하는 뜻을 담은 글을 써서 올렸다. 이때 화려하게 꾸민 간이 무대인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민간의 예능인을 불러 여러 놀이를 함께 공연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조선시대 내내 폐지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내용 및 특징

가요(歌謠)는 왕이 대궐 밖에 나갔다가 궁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 왕의 무사 귀환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글이다. 나이 많은 원로 신하들로 구성된 기로,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의 유생, 재주 많은 이들로 구성된 교방의 여기(女妓)들이 가요를 올렸다. 왕이 개성·평양·황주·청주 등 지방을 방문할 경우 그 지역의 기로·유생·여기에게 가요를 받았다(『세조실록』 2년 9월 29일)(『세조실록』 6년 10월 15일)(『세조실록』 10년 2월 23일)(『성종실록』 5년 9월 26일). 왕비가 온천을 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교방에서 가요를 드렸다(『세종실록』 22년 4월 6일).

이 행사는 왕이 궁에 들어가기 전에 길에서 행하였다. 숭인문(崇仁門), 혜정교(惠政橋), 돈화문(敦化門) 밖 등의 장소였다. 화려하게 꾸며진 길에 왕이 탄 어가(御駕)가 잠시 멈추어 서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는데, 왕을 송축하는 글인 가요를 올리고, 여기들이 궁중정재를 춤추며, 민간 예능인이 온갖 놀음을 펼쳤다.

교방에서 가요를 올리는 상황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기록되어 있어 상세한 절차를 알 수 있다. 먼저 침향산(沈香山)과 지당(池塘)을 설치한 후 여기가 침향산의 좌우에 갈라선다. 침향산은 널빤지를 산 모양으로 만들고 갖가지 장식을 새겨 꾸민 가설무대이며, 지당은 연못 모양을 널빤지에 꾸민 것이다. 이어 탁자를 설치하고 여기 2인이 탁자 좌우에 선다. 왕이 탄 수레인 대가(大駕)가 행사 장소에 도착하면 왕의 행차 앞을 따르며 연주하던 악대인 전부고취(前部鼓吹)가 여기의 뒤에 와서 선다. 자리 정돈이 끝나면 연례악의 하나인 「여민악령(與民樂令)」을 연주하며 노래한다. 그리고 그때 가요가 쓰여진 두루마리[軸]를 여기가 승지에서 바치면 승지가 내시에게 전달하고, 최종적으로 내시가 왕에게 올린다. 왕이 가요를 받으면 여기가 춤을 추는데, 학무와 연화대 등을 공연한다. 왕의 행차를 앞뒤에서 따르던 전부고취와 후부고취가 왕의 환궁을 알리는 풍악인 「환궁악(還宮樂)」을 연주하면 왕이 탄 대가가 이동한다. 즉 왕이 행사 준비를 한 장소에 멈춰 가요를 받고 정재(呈才)를 감상한 후 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행사가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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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림1_00015232_교방가요(『樂學軌範』권5)

변천

왕의 환궁을 송축하는 글이었던 가요를 왕에게 바치는 행사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로 전해진 것이었다. 조선초기 태조대와 태종대에는 잘 시행되었지만 세종대부터는 가요 봉헌을 자주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가요를 올리는 행사 때 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채붕을 설치하며 온갖 민간 놀이까지 함께 행함으로써 사치와 오락적인 요소가 많아,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가 지향하는 이념과 조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요를 올리는 행사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자주 있었으나, 그럼에도 이 행사는 조선후기까지 면면히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악학궤범(樂學軌範)』
  • 국사편찬위원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두산동아, 2008.
  • 사진실·정지은, 「‘놀이하는 임금’, 왕실 놀이의 정치학」, 『비교민속학』 46집, 비교민속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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