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방(敎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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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 향악 중 여악의 습악(習樂)과 연주를 담당했던 기관.

설립 경위와 연혁

교방(敎坊)은 중국의 당나라 고조가 처음 궁중에 설치한 기관으로 현종대에 확대되었는데, 배우의 잡기(雜技)나 여악의 습악을 주로 담당했었다. 이후 교방은 송대(宋代)에 와서도 속악을 연주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고려 광종대에 송나라로부터 중국의 속악(俗樂)과 악기, 악공을 들여왔을 때 중국교방의 전통이 같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에는 국가의 음악 기관으로 대악서와 관현방이 있었으며, 궁중에 왕실 소속으로 교방을 두어 많은 수의 여악을 두었다. 이렇게 교방은 여제자(女弟子)나 교방여제자(敎坊女弟子)로 불린 여악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의 교방은 창기(倡妓)들을 훈련시켜 대악서와 관현방에 공급하였으며, 연등회나 팔관회, 왕실의 중요한 연회에 가무와 풍류에 따라 찬양하는 말을 바쳤다.

조선조 초기에는 고려조의 음악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기에, 교방 역시 여기의 습악과 연주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존속하였으며, 교방의 여악은 궁중의 잔치에 계속 사용되었다. 교방은 중앙의 한 기관으로 왕실 소속이었으며, 향악이나 당악의 연향악을 담당했던 관습도감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장악원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번성했던 왕실의 교방은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로 오면서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즉, 사림들의 세력이 급부상되었던 중종대 이후 여악폐지론이 끊임없이 등장했을 정도로 교방 여기들의 음악은 고려조에 비해 현격하게 축소되었다. 즉, 중앙에 두었던 교방은 중종대 즈음에 혁파된 것으로 보이며, 중앙의 각종 연향에서 여악이 필요할 경우, 지방에 관속으로 교방이나 교방청, 기생청 등을 두어 여기들을 관리하고 습악시킨 후, 이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연향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렇게 지방의 교방에서 습악하여 중앙으로 올려 보내진 여기를 선상기(選上妓)라 하며, 궁중연향에서 선상기들과 궁중에서 생활하는 궁인들로 공연을 하게 했던 관행은 조선후기의 여러 진연·진찬·진작의궤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중앙에 설치된 교방의 기록은 대체로 인조대까지이나 외방에서는 영조대까지 교방의 기록이 보인다. 여악폐지론이 있었던 중종대 이후 『명종실록』에는 자전(慈殿)을 위한 연향인 진풍정(進豊呈) 때 지방의 기생을 불러올리기가 어렵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에는 부묘례 이후 환궁하는 어가 옆에서 교방가요와 침향산을 헌축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인조실록』에는 부묘례 후에 “채붕과 나례는 선조(先朝)에서 모두 정지하도록 명하였으며, 교방 역시 이미 혁파하여 지금은 모두 할 수 없습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중앙에 설치되었던 교방은 인조대 전에 혁파된 것을 알 수 있다(『인조실록』 12년 7월 25일).

의의

교방은 조선시대에 활동했던 공연 담당층 중에서 여성을 부각시켜놓은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지방의 교방에서 습악했던 다양한 공연 예술은 현재 전통 예술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교방가요(敎坊歌謠)』
  • 김창현, 「고려시대 음악기관에 관한 제도사적 연구」,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 이혜구, 「세종조의 음악기관」,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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