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풍정(進豊呈)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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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진풍정 |
한글표제 | 진풍정 |
한자표제 | 進豊呈 |
상위어 | 연향(宴享) |
관련어 | 진연(進宴), 진작(進爵), 진찬(進饌) |
분야 | 문화/예술/정재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진풍정(進豊呈)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7년 10월 2일, 『세종실록』 16년 3월 13일, 『단종실록』 2년 12월 21일 |
조선시대의 연향 가운데 가장 성대하고 의식이 정중한 궁중 연향.
개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격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조촐하게 올리는 잔칫상’ 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다가 성종대 이후부터 성대한 연향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뒤 중종대에 이르러 ‘웃어른에게 올리는 성대한 연향’이라는 의미로 확립되었는데, 주로 대비전에 올리는 연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검약이 강조됨에 따라 연향을 성대하게 벌이는 것을 경계하여 진풍정(進豊呈)보다 규모가 작은 진연(進宴)과 진찬(進饌) 등을 주로 베풀었다. 그 결과 인조대 이후에는 1624년(인조 2), 1630년(인조 8), 1686년(숙종 12)에 각각 대비전에 올린 세 차례의 연향만 진풍정으로 행해졌다.
내용 및 변천
조선 건국 초에 쓰인 진풍정이란 용어는 격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베푸는 조촐한 잔칫상을 의미했다(『세종실록』 7년 10월 2일), (『세종실록』 16년 3월 13일), (『단종실록』 2년 12월 21일).
그런데 이처럼 ‘조촐한 잔칫상을 올리다’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진풍정이라는 용어는 성종대를 거치면서 진연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진풍정은 이전과 달리 성대한 연향을 뜻하게 되었다. 중종대 이후에는 ‘웃어른에게 올리는 성대한 연향’이라는 의미로 확립되었는데, 대비전에 올리는 연향에 주로 쓰였다.
한편 성종대부터 쓰인 진연이란 용어는 조선시대 초기의 진풍정과 마찬가지로 ‘잔칫상을 올리다’라는 일반적인 의미였는데, 1657년(효종 8) 이후에는 진풍정보다 규모가 작은 예연(禮宴)을 뜻하는 말로 확립되었다.
인조대 이후에 베푼 진풍정은 1624년 10월과 1630년 3월에 선조의 계비이자 당시 왕대비이던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 올린 연향과, 1686년 윤4월에 인조의 계비이자 당시 대왕대비이던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회갑연이 전부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진풍정보다 규모가 작은 진연이나 진찬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수연등록』 1683년(숙종 9) 11월 19일 기사에 보면, 숙종이 “내년의 대왕대비 회갑은 평상시와 다르므로, 단지 진연을 행하는 것은 못내 아쉽다. 그러니 풍정을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영의정김수항은 “효종조에 처음으로 진연을 거행했는데, 대개 물력(物力)을 줄이기 위해서였사옵니다.”라고 하였고, 청성부원군 김석주는 “진연과 풍정이 다른 것은 외명부의 참석 여부입니다. 풍정에는 외명부가 많이 참석하는 만큼, 음식상과 차일(遮日)을 더 많이 준비해야 하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화를 통해 진풍정과 진연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풍정 관련 의궤는 1630년 3월에 대왕대비인 인목왕후에게 올린 풍정을 기록한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가 유일하다. 이 의궤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되어 있다가 2012년에 반환되었다. 풍정을 진풍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동사 ‘진(進)’과 목적어 ‘연(宴)’이 결합된 형태인 ‘진연’이 보통 명사로 쓰이게 되면서, 같은 형식으로 ‘진(進)’과 ‘풍정(豊呈)’을 결합하여 ‘풍정을 올리다’라는 뜻의 진풍정도 자연스럽게 보통 명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민속원 편집부, 국역『壽宴謄錄』, 민속원, 2004.
-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1.
- 송혜진, 「조선조 진풍정에 대한 연구」, 『國樂院論文集』 제2집, 국립국악원, 1990.
관계망